성(城)은 어디를 가나 침묵한다. 조용하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들 스산하다. 단단했던 성벽의 돌들은 풍상 속에 쇠잔해져 보이고 닫힌 성문엔 천년의 피로가 배어난다. 허물어진 성벽틈마다 왕족과 민중과 전쟁 영웅들이 남긴 피로 얼룩진 전란(戰亂)의 상처가 묻어난다.
어느 대륙보다 빈번한 전란의 역사를 지닌 유럽의 고성들은 프랑스 지역에만 8천개가 넘을 만큼 산'도시'들'바닷가를 가리지 않고 축성됐다. 중세 영주들의 권력중심지가 된 독일 라인강변의 낡은 성채들이나 도시 전체가 성으로 둘러싸인 이스탄불의 세계 최장의 성채, 중세 성곽도시의 모습을 거의 100% 보존한 스페인의 토레도 등은 유럽 문화유산의 뿌리를 들여다 보고 싶은 관광객들에겐 아직은 찾아 볼만한 답사거리다. 놀고 즐기는 단순관광에서 느끼고 역사를 체험해보는 속깊은 관광을 위해 (주)삼한 C1 후원으로 유럽의 고성 답사기를 8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1.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성
도시 성벽 중 방어용 성벽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긴(29㎞) 터키의 이스탄불 성벽은 50개 이상의 성문과 군데군데 300여개소의 요새가 구축돼 있는 막강한 성채였다.
B.C 7세기 첫 정착민이었던 메가란족이 처음 성벽을 쌓았을 때는 자그마한 성곽이었다가 동방 정벌에 나섰던 로마제국의 셉터투스 세베루스황제가 서기 196년 도시를 정복한 뒤 모두 헐어버리고 좀더 큰 성을 쌓아 세베루스성이라 이름지었다. 그 뒤 콘스탄틴 1세가 이곳을 제2의 로마 수도로 정한 뒤 세 번째로 다시 성을 보강했으나 테오도시우스 1세와 2세를 거치면서 422년 유럽 최대의 길고 튼튼한 성벽을 완공시킨 것이 지금의 성벽이다.
유럽의 고성들의 건축학적 형태는 대체로 대포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적의 공격에 유리한 얇은 벽체에 높이를 최대한 높인 구조 등이 많았다. 산악이나 고원, 강, 언덕에 높이 세운 성벽 등은 대체로 왕족이나 영주 등의 통치권의 과시와 방어효과를 위한 성들이 대부분이다. 도시 전체의 방어용 성벽은 지형적으로 최대한 성벽의 높이를 높였다.
특히 이스탄불 성벽은 로마제국이 확장'보수'개량축조한 성벽답게 수많은 전쟁을 통해 터득하고 체험했던 성벽 공격기술을 활용, 해자와 함께 3중 성벽에다 50m마다 돌축형 요새를 세워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성은 신(神)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깰 수 없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유럽 최강의 요새로 지키던 콘스탄티노플성도 약관 21세의 술탄 마호메트가 이끈 오스만투르크 군대의 신형 대포에 의해 1453년 5월 침략된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부대의 공격 병력은 10만, 성안의 방어군과 시민은 불과 8천여명, 병력수로 봐서는 곧장 함락될 것 같았던 성이 베네치아에서 보낸 원군을 기다리며 무려 4개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3중 요새형 성벽의 구조 덕분이었다.
그러나 헝가리에서 사온 길이 9m, 구경 15㎝의 거대한 대포 앞에서는 3~8m 두께의 성벽도 계속 견뎌내기는 힘이 들었다. 당시 대포의 사정거리는 불과 1천500m, 한번 쏘고 나면 3시간쯤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뿜을 수 있었다. 성안의 수비대는 무너진 성벽 구멍을 대포가 재장전될 동안 수백명이 동원돼 부지런히 응급 보수를 해가며 싸웠다.
그러나 투르크 군대의 난생 처음 보는 대포 공격의 공포에다 외곽에 또 다른 공격용 성(루멜리성'사진)을 불과 4개월만에 축성시켜 공격진지를 구축하는 위력에 기가 눌린 일부 시민들은 기까스로 도착한 구원군이 중간에 격파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흩어지기 시작했고 5월29일 방어군 사령관 조반지 롱고가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마지막 내벽 안으로 퇴각했던 병사들은 끝내 무참히 살육당한다. 이후 3일간 성안의 남은 노약자와 부녀자들은 점령군 등의 약탈에 희생됐다(당시 투르크 군대에는 '3일간의 약탈권'이란 것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터키 관광지의 핵심이 되고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당시 점령군이 성당의 주춧돌들을 파괴하려 했으나 약탈권은 주되 유적은 보호하라는 술탄의 명령에 의해 보존된 문화유산이다. 한때 전성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역과 정치의 허브 항구였던 콘스탄티노플도 성의 함락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이란 도시 이름도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이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이후 이슬람권의 오스만투르크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대포로 파괴했던 성벽을 복구하고 새로운 성문을 더 만들며 사원이나 왕릉을 세웠다. 다만 비잔틴 문화가 배어있는 소피아 성당 안의 성모상이나 그리스도 성상(聖像)'모자이크 작품들을 회칠로 덮어버리고 군데군데 십자가 문양을 지우고 이슬람의 제단을 꾸미는 정치'종교적인 조치를 했다. 그 뒤 세계적인 모자이크 성상 작품들은 1932~1933년 미국 비잔틴학회에 의해 다시 회칠이 벗겨져 빛을 보게 됐다.
92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면 약 500년 가까이 회칠 속에 갇혀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운 색상과 견고함을 간직해온 셈이다. 군데군데 뜯겨져 훼손된 부분을 보노라면 성(城) 주인의 종교와 정치적 사상에 우리는 성이 품고 있는 천년이 넘는 문화유산과 유적들의 운명도 함께 바뀌는 역사의 모습을 읽게 된다.
3천년 가까운 풍상을 맞으며 서있는 이스탄불성은 이제 21세기 문명이 뿜어대는 자동차 배기가스에 둘러싸인 채 무수한 전쟁과 문화창조의 역사의 편린들을 홀로 추억하면서 천년의 침묵을 지켜가고 있다. 말은 없어도 어쩌면 성벽 안팎은 바쁘게 오가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100년은 안돼 사라질 하찮은 굴재에 대한 연민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글·김정길(본사 명예주필)
사진·권정호(한국사진기자회 명예회원)
사진: (사진 위에서부터)이스탄불 주 시가지를 에워싼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성당안의 성상(聖像) 모자이크 벽화 중 일부.(성 공략 후 회칠로 덮였다가 재발견됐다) 오스만투르크 군대가 콘스탄티노플 성 공략을 위해 4개월만에 축성한 루멜리 성.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