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바로 지금

연초라서인지 수첩을 펼 일이 많아진다. 수년째 사용해온 낡은 수첩. 꽤나 복잡해진 그것을 뒤적이노라면 손때 묻은 갈피마다 시간의 흔적들이 오롯이 배어있음을 느끼게 된다. 먼 이국에서 뿌리 내리고 있는 벗들, 또 이젠 소식이 희미해진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피어난다. 그 이름 석자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지고, 기쁨이 샘솟고, 고맙고,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더러는 세월이 갈라놓은 틈을 느끼게 하는 이름, 미안해지는 이름들도 있다.

수첩 속의 이름 중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갔다. 한 사람은 삼년전, 또 한 사람은 보름 전 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수첩 속에서 살아있다. 당장에라도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 차마 그 이름들을 지우지 못하겠다.

을유년의 시간도 한 치의 예외없이 흘러간다. 올해도 새 이름들이 우리의 수첩에 올려질 것이고, 차마 지우지 못할 이름들도 생겨날지 모른다. 며칠 전 가수 길은정의 죽음은 미리 준비하는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일분일초가 힘겨울 말기암 환자로서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그토록 강인하고 초탈한 자세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죽음도 꺾지 못한 그 열정은 아마도 매순간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계 평화의 전도사로, 또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손수 망치를 들고 집을 지으면서 노후를 바쁘고 보람차게 살아가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작년에 특유의 활짝 웃는 웃음과 함께 "난 이제 겨우 80세라오"라며 유머를 던졌던 그는 저서'나이 드는 것의 미학'에서 참 근사한 말을 했다. 앵커 바바라 월터스가 "당신은 흥미진진하고 도전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최고는 언제였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바로 지금인 것 같군요".

카리스마 넘치는 연극인 박정자씨의 핸드폰 기초 화면 문구는'삶의 절정'이라 한다. 오늘은 우리 각자의 남은 삶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비록 지난해보다 잔주름이 더 생겼고, 걱정거리도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말 것은'바로 지금'이'내 삶의 절정'이라는 사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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