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함정에 빠져 선을 넘어버릴까봐 현장에서는 늘 긴장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지노선을 넘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 그 경계선을 넘지 않으려는 묘한 줄타기가 계속됐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가 얼마나 촬영을 즐겼는지는 한번에 알 수 있었다. 늘 차분하게, 흥분하지 않고 말하는 그라 이번에도 외양상으로는 마찬가지였지만 뭔가 좀 달랐다. 신이 나 있었다.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그가 이번 영화에 기울인 애정과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또 작업을 하면서 얻은 만족도가 어느 정도인지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침 인터뷰를 하던 날 저녁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영화에 대해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내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한석규가 그토록 마음에 들어하는 이 영화는 최근 며칠간 이슈가 되고 있다.
10·26을 그린 '그때 그 사람들'. 반갑게도 블랙 코미디다. 역사적으로 무척이나 심각한 사건이지만 영화 포스터 속 한석규는 풍선껌을 제법 커다랗게 불어제낀 모습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대통령을 시해하는 중앙정보부장의 부하 주 과장을 연기했다.
"사건에 휘말려가지만 나름대로 줏대도 있는 인물이다. 막 휩쓸려가지만 그래도 어떻게 한번 해결해보려고 애쓰는 인물이다."(웃음)
한석규는 주저함 없이 이 영화를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현대사에 관심이 많다. 한동안 '맡고 싶은 역이 뭐냐'고 물으면 없다고 했는데 6년전부터인가, 이인모씨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그분을 통해서라면 한국 현대사의 많은 부분을 집약시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그는 "그러던 차에 이번 영화를 제안받았다. 강한 풍자극 혹은 강한 주제의식이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었는데 임상수 감독님의 시선이 아주 독특하고 차별화돼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영화와의 궁합을 은근히 자랑했다. 이 영화는 2개월 반동안 42회 촬영만에 크랭크 업을 했다. 필름도 9만자에 그쳤다.
"그만큼 프리 프로덕션이 철저했고, 감독님의 머리 속에 한편의 영화가 꽉 들어차 있어 시종 뚜렷한 연출자적 시선으로 영화를 풀어나가는 것이 확 느껴졌다. 시행착오 전혀 없이 쭉 달려왔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 중 하나를 건드린 영화답게 '그때 그사람들'은 제작과정을 비밀에 부쳐왔다. 아직 역사적 해석이나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상황이고 유가족들이 살아 있어 여러모로 시비를 낳을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
한석규는 "10·26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래서 우선 기뻤다. 시대가, 환경이 그만큼 나아졌다는 얘기 아닌가. 10·26은 언젠가는 다뤄질 소재였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리메이크될 수 있는 이야기다"면서 "그러나 우리 영화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왜 1979년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가에 접근한 영화다. 드라마 '대장금'이 궁녀를 통해 또다른 궁중 이야기를 그린 것처럼 이번에도 사건에 관계되긴 했지만 어찌보면 사건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영화다"고 설명했다.
소재도 소재지만 블랙코미디라는 점이 또 걸린다.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 때문에 조심스럽다. 어렵고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 장르이지만 유가족분들이 계시니까 그분들 입장에서는 언짢고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라면서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에게 대단히 조심스러운 마음이고 여러모로 송구스럽다. 영화로서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석규는 1964년 생이다. 10·26 당시 중학교 3학년생.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는 초등학교 5학년이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박 대통령 서거 때는 그냥 큰일 났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주변에서 모든 걸 사재기 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집도 라면을 몇박스씩 샀다. 곧 전쟁이 난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각종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주 과장이 극중 껌을 계속 씹는 설정도 그의 아이디어이고 대사도 상당 부문 수정됐다.
"임 감독님이 '연기를 막 해달라. 대신에 잘 해달라'고 부탁했다. 상호간에 큰 믿음에서 출발할 수 있어 기분이 아주 좋았고 또 그렇게 연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촬영하는 동안 시나리오에 구애 받지 않았다. 어떤 때는 꽤 긴 대사도 아예 삭제한 경우도 있다. 감독님이 각본까지 쓴만큼 그런 부분은 굉장히 민감한 것인데도 전부 다 흔쾌히 받아주셨다."
듣고보니 한석규가 연기에 신을 낼 만도 했다. 그러니 NG도 거의 안 날수밖에.
"테이크를 세번 이상 간 신이 거의 없다. 또 절반 이상은 한번만에 오케이가 났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강했다. 또 내가 불안해도 그렇게 못 찍는다. 한번 더 하자고 했을 것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를 물었더니 그는 "너 IQ 몇이냐?"를 꼽았다. 이 역시 그의 애드리브로 "똑똑한 놈 세 놈만 있으면 된다"는 중앙정보부장의 말에 부하를 선별하면서 그가 내뱉는 말이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절박한 마음이 담긴 대사.
한석규가 자신있게 내놓는 블랙코미디, 상업적 매력이 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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