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탁주 일본서도 즐겨찾죠"

"그 정종만 마시는 일본인들도 몇년전부터 대구탁주를 수입해갑니다. 오는 20일 도쿄의 한 수입상이 콘테이너 하나 가득(6천~7천병) 대구 막걸리를 실어갑니다. 긴좌에서 1병에 1천3백엔하는 대구 막걸리를 마시는 일본인 애주가들이 그만큼 많지요."

농번기도 아니고, 공사철이나 야유회 시즌도 아니어서 막걸리 비수기인 요즘도 대구 탁주의 생산라인은 밤새 돌아가고 있다. 을유년 벽두부터 국내외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대구 탁주 김승대 지배인은 전국 최고의 막걸리로 성원에 보답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 '대구 탁주 주세요' 신촌서도 러브콜

대구 탁주에서 생산하는 막걸리는 하루 6만병 가량. 현해탄 너머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며칠전에는 이대, 연대, 서강대 등이 몰려있는 서울 신촌 대학촌 일대 음식점들이 대구 탁주를 공급해달라고 간청(?)해왔다. 달작지근한 서울식 막걸리는 불황의 터널에서 헤매는 서민들의 마음과 청년 실업으로 힘드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다는 판단이 앞섰을 터이다. 대구도 작년 한해 50여개의 막걸리 전문집이 생겨났고, 변두리에서는 1천원짜리 '잔 막걸리'집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사내 극기훈련이나 단합대회, 산행 뒷풀이로 막걸리를 대량 주문하는 곳도 많아지고 있으며, 바이오 전공 대학생들의 공장견학이나 막걸리와 BT의 융합을 연구하는 업체도 생겼다. 온라인에서도 막걸리 붐이 일어 최근에는 '막사모'(막걸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까지 생겨났다.

◆ 웰빙트렌드에 최악 경기의 묘한 궁합

막걸리의 부활은 'IMF 보다 더 하다'는 최악 경기와 '몸에 좋은 것은 천금을 들여도 아깝지 않다'는 웰빙 트렌드의 궁합이 묘하게 들어맞은 덕분이다. 불황과 내수부진으로 지난해의 경우 양주 맥주는 물론 대중주인 소주판매까지 줄었지만 막걸리만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소득이 높아지면서 막걸리는 외면당했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양주, 젊은 층은 맥주, 서민들은 소주를 마시면서 막걸리는 사라졌죠."

그러던 막걸리가 IMF 이후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하더니 하루 평균 생산량이 6만병으로 올라갔다. 병뚜껑에 구멍이 숭숭 뚫린 대구 탁주는 진공처리된 '통조림식 막걸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효모가 활동하고 있어 끊임없이 맛이 변하는 살아있는 술이다. "대구 막걸리의 경우 병에 찍힌 출고일에서 하루 뒷날 맛이 가장 좋습니다."

◆ 간첩도 무서워한 대포집

사실 대구 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은 막걸리의 고장이었다. 과거 경북의 막걸리 생산량은 전국 시도 가운데 1위였고, 소주 판매량은 막걸리 판매량의 1백분의 1 정도였다.

"옛날 대구 시청 옆 둥글관, 대성관 등에서 막걸리를 엄청 팔았지요. 둥글관에서는 하루에 말(18리터)통 막걸리를 100개 이상 들였고, 술꾼들은 엊저녁에 막걸리 몇 주전자 마셨다는 것이 자랑이었으니까요."

대구 남산동, 향촌동, 봉산동 일대 막걸리 집이 넘쳐나던 시절, 이북에서 간첩이 내려왔다. 작업이나 좀 할까싶어 남산동 봉산동 일대를 어슬렁거리는데, 눈에 띄는 가게마다 '××대포집'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아니 무슨 대포가 이렇게 많노? 이거 원 무서워서..." 간첩도 좇아버린 무서운 대포집(?)은 막걸리집의 퇴락과 함께 대부분 사라졌지만 남산동의 도루묵집은 그대로 남아있다. 남산동 도루묵집은 헐값이던 도루묵이 아주 비싼 생선이 되어버렸는데도 여전히 도루묵을 구워낸다. 도루묵 안주를 고수하는 도루묵 아지매의 마음씀이 젓가락으로 휘 둘러 들이키는 탁주 한잔으로 세상시름을 잊는 서민들의 맘을 다독여준다.

◆ 고 박대통령도 대구 막걸리 즐겨찾아

막걸리를 둘러싼 추억이나 애환을 간직하지 않은 중, 노년층은 별로 없다. 겨울날 해거름에 찌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아버지 술심부름을 갔던 일이나, 통금이 풀리면 술통을 서너개씩 매단 짐자전거꾼이 새벽을 열던 소리, 막걸리로 신고식을 하던 대학생들, 꼴깍꼴깍 올려내면서도 계속 막걸리를 들이키며 호기를 부리던 남학생들...

"누구누구해도 막걸리를 가장 사랑한 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죠." 박 대통령은 대구에 내려오면 수성관광호텔에 묵으면서 하루전날 비서를 보내 제조과정을 다 지켜본 뒤 막걸리를 말통으로 사갔다. 회식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맥주에 막걸리를 섞은 막걸리 폭탄을 즐겨 돌렸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덕에 70년대에는 하루 막걸리가 30만명 이상 팔렸다.

◆ 이병철 회장도 대구에서 양조장 경영

대통령이 마시면 따라서 막걸리를 마시듯이, 위정자가 기업을 돕는 방법은 이처럼 단순할 지도 모른다. 기업이 새로운 성과를 낼 때마다 등 두드려주고, 어려운 일 있으면 현장에서 그 소리 들어보고, 찾아주고...

귀한 손님이 오면 술부터 빚던 우리네 풍속은 주세령(1916년)으로 금지됐고, 양조장은 1934년에 통폐합됐다. 광복이 되면서 일인들이 경영하던 100여개의 양조장은 한국 기업가들에게 불하됐다. "삼성그룹 고 이병철회장도 반고개 우측의 조선양조장을 인수받아 집안 친척을 통해 운영했지요."

70년 5월 국세청이 세수 확보와 주세 일원화를 위해 양조장을 통합시켰고, 서울에는 서울막걸리, 부산에는 부산막걸리, 청도에는 청도막걸리가 생겨났다. 대구에는 불로 막걸리와 팔공산 동동주를 생산하는 대구 탁주가 있다.

식량이 모자라던 시절에는 잡곡 막걸리를 빚다가 쌀 수확이 늘면서 쌀 술이 다시 제조됐다. 그래도 대구 소비자들은 쌀 막걸리보다 밀 막걸리를 세배나 더 좋아한다. "프랑스에는 와인이 수출효자품목이죠. 우리라고 못할 것 있나요. 대구에서 최고 막걸리 만들어봐야죠."

편집위원 magohalmi@imaeil.com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jhchu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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