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억측에서 실체적 접근으로'…전문가 견해

정부가 40년 만에 한일회담 문서 일부를 공개하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환영의 뜻을 보이면서도 공개대상의 내용과 분량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일제강점피해자 99명의 소송에서 비롯된 이번 문서공개는 전문가가 아닌 사법부의 판단에 근거를 뒀기 때문에 10년 넘게 진행된 협상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정부가 일단 공개자체를 금기시하던 회담문서의 일부라도 빗장을 풀어줌으로써 그동안 숱한 억측과 소문에 싸여있던 한일회담 타결과정에 대해 실체적 접근이 가능하게 됐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17일 문서 공개에 따라 피해자들에 대한 재보상 가능성을 질문 받고 "일본 정부의 입장은 한국은 물론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동아시아 전체에 대해 배상이 불가하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라며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이 교수는 회의록 일부를 지적하면서 "일본 대표단이 개인 보상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확인되나 이는 한국 측이 요구하는 액수를 줄여보기 위한 '교섭기술'로 봐야 한다"면서 "이후 속개된 회담에서 일본은 경제협력 논리를 내세웠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이유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병 및 이후의 통치행위를 합법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라면서 "한국 정부가 (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에 대해 현행법 테두리에서 정치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일회담 문서 공개가 북·일 수교에 장애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에 대해 " 한국 정부가 유엔총회 결의 중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195조 3항)를 주장했으나 일본 측 논리는 조약의 범위를 38선 이남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실제로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과의 교섭을 남겨놓은 일본 측이 협상전략이 노출된다는 이유에서 한일회담 문서공개를 반대했다"면서 "하지만 평양선언 발표 후 양국 간 액수에 대해 의견일치를 본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일부에서 거론된 한·일간 재협상 주장에 대해 물질적인 부분보다 정신적으로 청산하는 게 중요하다며 "남북한과 일본 등 3국이 공동성명형식을 통해 식민지배 등에 대해 거론하는 방법도 있다"고 제안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문서공개 내용과 범위에 대해 "일단 중요한 부분인 6, 7차 회의기록이 나왔다"면서 "정부가 순차적으로 공개하겠다는 것을 믿고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문서공개에 따른 재보상 요구에 대해 "당연히 요구할 것"이라면서 "김모씨의 경우 징용피해 결과로 오른팔을 완전히 잘라낸 상태이지만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밝혔다.

특히 그는 한일회담 재논의 필요성에 대해 "한일회담은 (베트남) 전쟁공조를 위해 타결됐기 때문에 (또 다른 전쟁인) 태평양전쟁 피해자의 인권과 보상을 철저히 외면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남은 회담 자료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구할지에 대해 "일제강점피해자 99명이 집단소송을 제기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라면서 아직 단정적으로 말할 단계는 아니라고 말했다.

일본 내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의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계기로 양국 정부의 '책임론'을 비롯한 개인배상 등을 둘러싸고 잠복했던 복잡한 현안들이 부상할 가능성을 점쳤다.

한국 정부가 일본 측의 개인배상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데 따른 전쟁피해자의 개인배상 책임논란과 일본 정부의 국제법상 도의적 배상책임 및 일종의 민간채권인 강제징용자의 미불 공탁금 문제, 일본과 북한과의 수교협상시 적절한 배상규모 산정 등이 그것이다.

일제 강제징용피해자에 대한 개인배상 소송을 주도해온 다카기 겐이치(高木健一) 변호사는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을 통해 '경제협력' 자금을 받음으로써 전쟁 피해자 개인이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차단됐다"며 "그 후 피해자들은 개인배상 청구 소송에서 모두 졌다"고 지적했다.

한일협정 문서의 공개로 일본 정부가 개인배상을 고려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지적이다.

최근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들이 일본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개인배상 청구소송에서 13년에 걸친 재판 끝에 패소한 것은 이러한 한일협정의 부산물인 셈이다.

다만, 다카기 변호사는 독일이 피해자 개인에게 보상한 사례를 들며 "한일협정만을 놓고 볼 때 일본 정부의 법률적 배상책임은 끝났을지 모르나 국제법적 관점에서 피해자 개인의 권리가 소멸됐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한일협정이 체결된 한국과 일본의 경우와 독일과 피해 각국의 경우가 달라'전례'를 찾을 수 없는 점도 배상책임의 소재 등을 둘러싼 해석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재일 조총련계 조선인강제연행 진상조사단 홍상진 사무국장은 "일본 정부가 한일협정을 통해 개인 배상문제를 해결했으며 한국 정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서도"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종의 민간채권으로 수천 억 원에 달하는 강제징용자의 미불 공탁금을 지급해야 할 의무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독일이 미국인 등 나치피해자들에게 유엔을 통해 개인배상을 하고 있으며 그 자금을 폴크스바겐 등 기업이 내고 있는 것을 상기시키며 일본이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린다면 '법적 책임 종결' 운운할 것이 아니라 과거사 문제를 명확히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홍 사무국장은 이번 문서공개를 계기로 '재일조선인'의 문제도 재검토돼야한다면서 "협정 기본조약 3조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못박은 탓에 일본에서는 한국만이 '국적'으로 인정받고 '조선'은 국적도 아닌 상태"라며 "한국 정부의 잘못된 협정체결로 재일조선인이 엄청난 차별을 받았으며 일본에 의한 남북관계 분열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한반도 전문가인 이즈미 하지메(伊豆見元) 시즈오카(靜岡) 현립대 교수는 일본정부는 한일협정이 '경제협력'을 매개로 국교정상화를 한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관련 문서공개도 '한·일간의 문제'가 아닌 '한국 내 문제'로 판단하고 있다고 전했다.

따라서 일본 정부로서는 문서공개에 이러쿵저러쿵 말할 입장이 아니며 문서공개에 따른 양국 간 외교갈등의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또 북한과 일본 간의 국교 정상화 협상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면서 이는 양국 정상이 2002년 9월 합의한 '평양선언'에서 국교 정상화 후 일본의 대북 경제협력으로 수교협상의 가닥을 잡아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역시 한반도 전문가인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대학 교수는 일본의 대 북한 경협자금을 놓고 항간에 '100억 달러 설'이 있다면서 이는 "일본이 한일협정으로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제공하고 추후 전두환 정권시절에 40억 달러의 경협자금을 지원한 것을 현재가치로 환산할 경우 얼추 100억 달러 수준이라는 것으로 하나의 협상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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