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 부자의 가훈(家訓)에 나타난 경영철학은 시대의 변화에도 소중한 일깨움을 안겨준다. '10대에 걸친 300년 부(富)'의 비결은 청렴한 선비정신과 투철한 국가관, 충절'애민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빈민 구제를 통한 재산의 사회 환원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세계사에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그 '오랜 부의 비결' 중 첫 번째 덕목은 '근검절약(勤儉節約)' 정신이다. 선대(인조 때)의 최진립이 일으켰던 '청백리 정신'을 후손들이 저버리지 않아 부가 지속될 수 있었다. 물건을 아껴 쓰고 이웃에 나누어 준다든가,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라는 가훈은 그런 정신의 소산이다. 근검절약과 나눔 정신이 몸에 배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어 이 삭막한 시대에 귀감이 돼야 한다.
두 번째 덕목은 재산을 모으는 과정이 정당성'도덕성을 담보로 했다는 데 있다. 그 부의 출발인 최국선(1631~82)에서 최준(1884~1970)에 이르기까지 흉년 때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했다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 실천 덕목이 가훈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에 나타나 있다.
이 집안의 이 같은 선린정신은 동학혁명 때도 화를 피하게 했다. 이익 추구를 위해서는 무차별 인수'합병하는 '약육강식'의 논리와는 사뭇 다르다. 소작인들이나 일반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지 않고, '정당성의 원칙'을 지켜 존경받았고, 오랜 부도 누릴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재지지주(在地地主)로서 마름을 쓰지 않고, 향리에서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아픔을 최소화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은 돋보인다. 가훈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가 말하듯, 농민 수탈을 통해 부를 더 키울 수 있었으나 적정 이윤만 도모, 추호의 원성도 사지 않았다. 최 부자는 이처럼 '극대'나 '최대'보다는 '적정'이나 '차선' 선택으로 부와 안정을 꾀했다. 아호마저 최세린은 대우(大愚), 최현식은 둔차(鈍次)로 하고, 이를 본가 문미의 액판으로 만들어 붙일 정도였다.
조선조는 양반 지배 사회였다. 양반 신분 유지가 곧 부의 유지 조건이었으며, 재산의 유지는 진사(進士) 이상이어야 가능할 정도였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란 가훈은 그래서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학문을 해서 양반 반열에 오르되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데는 권력에 맛들이면 그 다툼에 휘말려 보복 당할 경우를 우려한 '지혜'가 자리 잡고 있다. 철저한 '정경분리(政經分離)'주의였던 셈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정치는 금력을 이용하고, 재력가는 금력으로 세력을 매수하려 했다. 이권을 얻어 더 많은 부를 얻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정경유착(政經癒着)으로 이룬 부는 오래지 않아 정적(政敵)에 의해 파멸에 이르게 마련이었다. 부의 지속에는 '정치적 중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훈은 어떤가. 당시 과객 중에는 풍류객'선비'무인 등 도 많았을 게다. 그들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인심만 얻었겠는가. 지식과 문화 교류를 통해 다른 지방의 정보를 얻고, 집안 인심을 널리 알리는 홍보 효과도 얻지 않았을까. 또한 가훈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가 이르듯, 나누고 베푸는 '공동체적 노사 관계' 맺기는 휴머니티의 발로이면서 불만 세력을 잠재우는 전략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은 더 나아가 나라를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독립투사 안희제와 협력해 백산상회를 만들고, 막대한 재산을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인재 양성을 위해 1947년에는 대구대학(1967년 청구대와 통합해 영남대학교가 됨)을 설립, 모든 재산과 서책들을 이 재단에 기탁하지 않았던가.
이 내용을 소상히 담은 전진문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건 오늘의 사회나 부자들이 그런 덕목들과 거리가 먼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리라. 성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부유해질수록 마음은 가난해지는 사회, '부익부 빈익빈'을 넘어서는 정당성과 도덕성이 받들어지는 사회는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일까.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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