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철조망의 문화사

악마의 끈 / 앨런 크렐 지음 / 사계절 펴냄

철조망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존재다. 세계에서 가장 긴 철조망인 휴전선과 해안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심 한복판에서도 철조망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철조망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울타리?한 갈래다. 하지만 철조망이 울타리보다 불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철조망이 단순히 방어와 구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통제'와 '감금'을 상징하는 철조망은 공격적이며 단 한번도 땅과 조화를 이룬적이 없었다.

뾰족한 가시를 일정한 간격으로 물고 있는 굵은 철사, 철조망. 하지만 그 단순함과 간편함에 비해 철조망이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실로 엄청나다. 철조망은 영토 확장과 식민지 개척, 지역 또는 국가 간 갈등, 감금과 대량학살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사악한 통제의 도구는 예술, 미디어,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해 또 다른 역사를 구축해왔다.

◇ 생활용품이 억압의 상징으로

'악마의 끈'은 철조망을 통해 근대사의 스산한 풍경을 돌아본 책이다. 호주 시드니의 뉴사우스웨일스대 예술대학 교수인 저자는 문학과 회화, 사진, 만화, 영화, 광고, 패션 등 다양한 예술장르에 등장하는 철조망의 의미를 분석한다. 단순한 생활용품이었던 철조망이 '제국주의의 최전선'으로, '자본주의의 위엄에 찬 담장'으로 '학살과 억압을 상징하는 시대 정신'으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1850년 프랑스 농장에서 처음 선보인 철조망은 '가축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용적인 장치였다. 1874년 미국에서 발전된 형태의 철조망이 나온 이후 철조망은 미 서부 개척과 건설 붐을 타고 급속한 성장을 거듭했다. "강하다. 누구나 손쉽게 다룰 수 있으며 울타리 재료로도 그만이다. 그래서 쉽게 설치할 수 있다. 게다가 영구적이다."

하지만 철조망의 구획과 통제는 서부에 정착한 백인과 철도회사로 대표되는 자본가의 이익의 산물일 뿐이었다. 인디언에게 철조망은 대초원을 갈라놓는 '악마의 밧줄'이었다. 방목으로 가축떼를 키우던 농장주들은 가축들이 개울을 코 앞에 두고도 수천마리씩 떼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급기야 농장주들은 야음을 틈타 철조망 울타리를 부수기 시작했다. 1883년 텍사스에서 시작된 '철조망 절단 전쟁'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철조망은 전쟁터와 강제 수용소에서 치명적인 전쟁도구로 변했다.철조망은 인간의 고통과 억압, 끔찍한 경험 그 자체였다. 1차 대전 당시 영'미 연합군과 독일의 최대 격전 중 하나인 '솜'전투에서 영국군은 돌격을 개시한 첫날에만 무려 6만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독일이 설치한 철조망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철조망은 해방의 수단이 됐다. 매일 아침마다 인부들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서 온 몸이 뒤틀린 시체들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대신 '철조망 껴안기'라고 불리는 자살을 택했다. 이처럼 유대인의 기억에서 학살과 동의어가 된 철조망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폭력적으로 구분하는 도구가 됐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 냉전시대에는 민주주의 수호자

냉전 시대 철조망은 변신을 거듭한다. 1958년 미국철강회사가 펴낸 '뉴 프런티어스'는 철조망을 민주주의의 담론 속으로 끌어들였다. "철조망은 민주주의의 최초의 수호자다. 지난 전쟁에서 철조망은 군 초소와 연구소, 우리나라의 식량을 생산하는 농장에 사용되었다." 고통과 억압의 상징이던 철조망이 '수호자'의 산물이 된 것이다.

'악마의 밧줄'은 통제'억압의 도구로서 다양한 정치적 상징을 낳았다. 넬슨 만델라의 철조망 면류관은 흑인 해방을 위해 그가 겪은 기나긴 투옥과 연금 상태를 의미한다. 일상으로 들어선 철조망은 천박한 자본주의와 결합했다. 1970년대 '바베어리언'으로 불리던 철조망 수집가들은 6만5천명에 달했다. 가격도 종류에 따라 18인치당 100달러에 이르기도 했고 헌트 상표처럼 희귀한 경우에는 1천달러 이상 호가했다. 철조망은 위협이면서 눈부신 욕망의 화신이기도 했다. 육감적인 몸매의 파멜라 앤더슨이 출연한 영화 '바브 와이어'에서 철조망은 예리한 공격을 상징하는가 하면, 선망의 대상이면서 손에 넣을 수 없는 여성의 성(性)을 상징한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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