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세광 사건때 일본도 단교 각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은 해방후 한일관계상

가장 나쁘고 긴장됐던 문제로 양국간 국교 단절 직전까지 가게 한 사건은 이 사건

밖에 없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당시 주한 일본대사관 정치부 1등 서

기관이었던 마치다 미쓰구(町田貢·69)씨는 당시 사건을 이같이 평가하고 당시 우시

로쿠 도라오(後宮虎郞) 주한 일본 대사가 대사관 직원들에게 철수 준비까지 지시했

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일본은 한국을 납득시킬만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연일 대

사관 주변에서 데모가 발생할 정도로 한국내 반일감정도 고조됐기 때문에 우리 대사

관은 한국측의 단교통보를 각오하고 통보만 하면 바로 1~2일내에 철수할 준비를 갖

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조총련에 대한 단속과 이번 사건에 대한 사과를 일본에 요구했지

만 당시 일본내에서는 사회당·공산당 등 혁신계를 중심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고 치안 당국은 당국대로 한해 전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

건으로 한국을 괘씸하게 생각하던 분위기였기 때문에 한국측 요구를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치다씨는 "일본 치안당국의 한국에 대한 괘씸한 감정은 당시 진행되던 양국

치안 당국자간 접촉까지 일본측이 중단한데서도 드러났다"면서 "한국측이 수사와 단

속을 요구하더라도 열심히 일할 마음이 들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당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사회당만 하더라도 북한의 일본인 납

북 사건 자체까지 불과 몇년 전에야 인정할 정도로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

기 때문에 한국 정부와 박 대통령을 향해 곱지않은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

다.

특히, "일본 당국은 조총련을 시끄러운 단체로 규정, 사실상 방관만 하던 상황

에서 저격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 정부가 단속을 요청해도 '위법행위가

있을 경우에만 단속할 수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당시 외무상이었던 기무라가 자민당계 온건파였지만 사회당의 입장에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이해력과 동정심이 부족했다는 점도 양국 관

계를 악화시킨 원인으로 지적됐다.

마치다씨는 "기무라 외상은 당시 '문세광은 한국인, 권총은 일본에서 탈취해 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피해자'라든지 '북한의 한국에 대한 위협은 없다'라는 발언을

함으로써 한국을 격노케 했다"고 소개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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