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일이 없는 한 나는 일요일 아침마다 목욕탕에 간다. 습관이 들어서인지 몸이 먼저 알고 기다리는 눈치여서 웬만해서는 빼먹는 일이 없다. 마침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목욕탕이 몇 군데나 있고, 차를 타고 잠시만 나가면 이름난 온천들이 있어 일요일 아침 나들이에 제법 재미를 기대할 수 있다.
내가 기꺼운 마음으로 목욕탕을 찾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무엇보다도 겹겹이 걸치고 있는 세상의 옷을 벗고 온전하게 알몸이 되는 묘미가 만만(滿滿)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옷을 벗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려진 내 집이라 해도 벗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설령 혼자 있다 해도 알몸이 된다는 것은 괴이쩍은 일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사후에도 옷을 벗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니 잠시라도 알몸으로 뒹굴며 돌아다닐 수 있는 목욕탕이야말로 가벼움을 거침없이 즐길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그런 기분에 오늘도 나는 엄동의 추위를 무릅쓰고 목욕탕 나들이에 나선다. 하지만, 현관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순간, 손에 가득 잡히는 느낌이 수상하다. 오늘따라 새삼스럽지도 않은 열쇠꾸러미가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면서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열쇠들을 헤아려 본다. 현관 열쇠가 두 개일 터이고, 차 열쇠에다 사무실의 서랍 열쇠, 문학회 열쇠까지 셈을 해나가다가 그만두기로 하였다. 아마도 목욕탕 입구에서 한두 개의 열쇠를 더 받으면 열 개는 족히 넘으리라.
목욕탕에 들어서면 나는 옷을 벗고도 서둘러 욕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선뜻함을 즐기며 두 손으로 온몸을 비비거나 팔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면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은 욕실문을 열고 들어설 때 후끈하게 부딪혀 오는 열기를 즐기기 위해서다.
수증기에 싸여오는 그 끈적한 훈기는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알몸으로 느꼈음직한 비릿한 원시내음 같은 것이다. 거기에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한참 동안 머리로 받고 있노라면 한 주일 동안 머리를 가득 채웠던 고약한 생각들이 온몸을 타고 내려와 발밑에서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목욕탕에서의 짜릿함은 아무래도 열탕에 몸을 담글 때다. 두 발을 담그면서 시작되는 따끔한 가려움증은 물이 가슴께를 거쳐 목에 이르면 저절로 신음을 토하게 하는데 그 순간 온몸의 숨구멍은 일제히 뜨거운 기운을 받아들이고 그 기운은 다시금 휘돌아 머리로 솟구쳐 오른다.
그러면 지친 심신이 세상에서 감당했을 등짐이라도 덜어내려는 듯 '끙'하는 깊은 탄식이 흘러나오고 이때부터 나는 명상가인 양 눈을 감으며 잠시 미루어 두었던 열쇠꾸러미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사실 이 순간만큼은 옷장 속의 열쇠꾸러미 따위는 망각의 깊은 늪에 잠재워 두고 싶은 심정이다. 알몸이 빠져나간 뒤의 껍데기들만 꼭꼭 가두었을 저 열쇠들은 언젠가는 벗겨내야 할 묵은 때와 같은 것들이다.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갔을 저 편 너머의 허접쓰레기 같은 가재도구들이며,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던 명패들이며, 불쏘시개와 같은 책 나부랭이들이 도대체 무엇들이란 말인가 .
이쯤 해서 나는 자리를 옮겨 거울 앞에 서서 몸을 비춰보는데 족쇄와도 같은 열쇠꾸러미에 지친 빈한한 알몸에게 진심으로 연민의 정을 보내는 시간이다. 이처럼 목욕탕에서의 알몸 행위는 기진하도록 반복되지만 욕실을 나설 때의 가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겨드랑이를 스치고 사타구니를 비껴가는 알몸의 안온한 자유도 옷장을 열고 세상의 옷들을 하나씩 걸치면서부터는 무디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나는 열쇠꾸러미를 만지작거리며 이전보다 개수를 더 늘릴 궁리에만 골몰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서 지친 몸이 칭얼거리는 주말은 또다시 돌아올 것이고, 즐거운 일요일 아침의 나들이에 마음은 잠시 동안 부풀어 있을 것이다.
홍억선(수필가·계간 수필세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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