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위기의 천년고도 慶州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 무주에 태권도공원을 '빼앗긴' 산내면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지난 세월 개발이란 개발은 모두 이곳을 비켜 갔다.

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주민 10명은 1970년대 농로 포장사업이 지난 100년 내 유일한 개발이라고 했다.

레미콘 차량 진입조차 불가능한 마을 길 때문에 주민들은 벽돌집도 마음껏 짓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10여년 전부터 젊은 사람들은 마을을 떴고, 동네 70여 명 가운데 최연소 주민이 '63세'다.

한때 200명이 넘었던 초등학교도 30여 명의 분교로 변한 지 오래. 이런 주민들에게 태권도공원 유치 실패는 '청천벽력'이었다.

주민들은 '버려진 오지가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신라 이후 최초의 개발' 꿈에 부풀었지만 정부는 경주를 버리고 무주를 택했다.

주민들은 "지역균형 운운하는데 이곳이야말로 국토 균형발전이 가장 시급한 곳"이라며 "'우리'들의 분노와 절망을 정치권은 모를 것"이라고 노기를 감추지 못했다.

취재팀이 지난 24일부터 3일간 경주 전역의 현장 목소리를 들은 결과 시민들은 "경주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없다"고 낙담했다.

'지난 40년 오로지 문화재 보호를 위해 희생했다', '경마장, 태권도공원 등 잇따른 국책사업 실패는 천년고도의 자존심만 짓밟혔다', '관광객 감소로 도심 상권이 피폐화하고 있다'. 만나는 시민마다 그늘 뿐이었다.

'화랑들이여 총 궐기', '태권도공원은 정치 흥정인가', '태권도와 문화재도 월성원전도 함께 가져가라', '태권도공원 정치 논리로는 안 된다'… 시내 곳곳은 태권도공원 발표 한 달이 다 돼 가는데도 정부를 성토하는 수백 개의 플래카드가 메우고 있었다.

태권도공원 경주유치추진위 최암 위원장은 "시민들은 '약탈' 당한 기분이다.

태권도공원 실패로 촉발된 분노는 월성원전 반대, 고도보존법 결사 저지 운동 등으로 번지고 있다"며 "천년고도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모든 대책 방안을 강구할 계획"이라고 했다.

같은 날 경주 시내 황오고분길. 이곳에서만 40년을 산 박성택(67)씨는 '문화재보호법'은 '원수'라고 했다.

비가 와도, 천장이 무너져도 사적지 내 주택들은 수리를 전혀 할 수 없다고 분개했다.

"하수도 같은 도시기반시설도 수십 년째 그대로여서 비만 오면 집안에 물이 차고 하루에도 수백 번 이사가고 싶을 뿐이었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여기에 이사 올 사람은 없습니다.

"

문화재청은 2002년부터 새 관광자원 개발을 위해 문화재보호법 지정 40여 년 만에 시내 12개 사적지구(53만6천 평) 1천441가구에 대한 토지매입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5천80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한 이 사업은 10개 년 사업(2002~2011년)이어서 또 다른 문제점을 낳고 있다.

전면 정비가 아닌 '찔금찔금' 방식이고, 그것도 예산이 덜 나와 도심이 슬럼화하는 상황이다.

실제 황오고분길은 빈집마다 쓰레기가 넘쳐나고 악취가 진동해 이곳이 과연 관광지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주민들은 "10개 년 사업의 실제 연간 예산은 200억~250억 원에 불과해 사업이 20년 이상 늦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했다.

시민들은 유례없는 불황에도 절망하고 있었다.

황오고분길 맞은편 청명길. 한 집 건너 한 집이 폐업했다.

식당, 미용실, 동물병원, 약국, 옷집 등 업종 불문이었다.

'점포정리', '점포세 놓습니다' 등 영업은 하지만 조만간 문을 닫으려는 가게들이 상당수였고, 50%에서 90%까지 가격 인하를 내건 상점들이 부지기수였다.

상인들은 "시내 25개 상가, 3천여 점포 중 지난 2년간 문을 닫은 가게만 1천여 개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런 판에 대구∼포항 고속도로 개통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라고 했다.

권대원 경주경제살리기 대표는 "건천 톨게이트 직원에 물어 보니 경주 방문 대구 차량이 30% 이상 줄었다"고 했고, 박병수 경주상가발전협의회장은 "관광식당도 전멸 직전"이라며 "경주를 떠나 포항, 울산에 새 둥지를 트는 상인들도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수 경주시가지발전연구소장은 "경주는 지금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다"며 "정부는 경주를 지방의 소도시가 아니라 한국의 역사문화 1번지, 천년고도의 숨결을 간직한 도시라는 시각으로 다시 보고, 경주의 발전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획탐사팀=이종규·이상준기자 경주·박정출기자사진: 문화재청의 경주 정비 사업이 오히려 도심을 슬럼화시키고 있다. 사진은 경주 최대 관광지 황오고분 주변 주택가. 박노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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