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재생산되는 '영웅'

영웅만들기-신화와 역사의 갈림길 / 박지향 외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무릇 영웅이란 죽고 나서 한층 더 길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며, 그런 사후 인생이 펼쳐지는 무대는 바로 후세인들의 변화무쌍한 기억이다." (크리스티앙 아말비, '영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영웅의 이면에는 각 시대의 욕망이 숨어있다. 정치 정세가 변하고 시대 상황이 바뀔 때마다 영웅의 초상은 새롭게 덧칠된다. 나폴레옹은 그 단적인 예다. 유럽 각지에 삼색기를 휘날리며 '프랑스의 구세주'로 갈채를 받던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코르시카의 식인귀'로 증오를 받았다. 그는 1821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 뒤에야 비로소 화려한 부활의 길을 걸었다.

나폴레옹은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의 국난기에 민족 감정을 고양하는 구국의 영웅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재건 과정에서는 위대한 프랑스 그 자체로 자리잡았다.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머나먼 한국에서도 원용된다.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말등에서 진격을 명하는 그의 초상화는 가장 흔한 '이발소 그림' 가운데 하나였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그의 금언은 박정희에 의해 군사주의적'개발주의적 색채를 띤 '하면 된다'는 구호로 번역됐다.

◇ 숨은 신이 되어 민족정체성 조종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를 비롯해 6명의 사학자가 함께 써낸 '영웅 만들기-신화와 역사의 갈림길'은 영웅을 둘러싼 신화가 만들어지고 전승되는 과정을 그 시대의 구체적 상황에서 살펴본 책이다. 근'현대에 걸쳐 어떻게 영웅이 만들어지고 신화화되었으며 그러한 기억이 지배 권력의 부침과 정치적'사회적 갈등 속에서 왜곡'조작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이 택한 주인공은 정복자 나폴레옹, 성녀 잔 다르크, 여왕 엘리자베스, 두체 무솔리니,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등 5명이다. 이들은 19, 20세기 초반 민족주의가 위세를 떨칠 당시 국민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했다. "근대 이전의 영웅은 초인적 능력을 지녔지만 대체로 국가나 민족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 이후의 영웅은 서로 모르는 이들을 민족으로 묶어주는 상상의 원천이 된다. 영웅들은 민족 정체성이라는 숨은 신이 되어 구성원의 내면을 조종해갔다."

생전엔 군주정에 묻혀있다가 19세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재발견된 잔 다르크 역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우파는 가톨릭적인 순수함으로 무장한 성녀로, 좌파는 교회와 왕조에 의해 희생된 민중의 딸로 기억한다. 지금 잔 다르크는 페미니스트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의 경우 살아서는 게르만 영웅신화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숭배됐고 죽어서는 독일의 수호정신이 되었다. 히틀러는 비스마르크의 이미지를 교묘히 이용했다.

집권 초기에는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비스마르크의 후계자를 자처했지만 총통에 대한 숭배가 본격화되자 비스마르크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현재 그는 대중적 숭배의 대상이 아닌 유능한 현실 정치가로 인식된다. 이 외에도 엘리자베스의 '여성성'과 무솔리니의 '동지' 개념도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용됐는지 보여준다. 이 책은 또한 각 인물 첫 장마다 '들어가기'와 '연표'를 실어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의 이해를 돕고 가상인터뷰와 독백 등을 실어 영웅의 현대적 의미를 생생하게 전한다.

◇ 시대 따라 덧칠된 욕망 읽을 수 있어

오늘날 '영웅숭배'는 많이 퇴색했다. 전쟁과 민족 서사시의 주인공들이 퇴장하고 미디어 스타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하지만 권위와 신화가 사라진 현대에도 사람들은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공해 줄 구체적인 인격적 대상을 여전히 갈구한다. TV 드라마로 잘 다듬어진 '성웅 이순신'이나 '해상왕 장보고'에 열광하는 현상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이 과거의 영웅들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우리는 영웅을 만들고 그들의 초상을 새롭게 덧칠해온 각 시대의 서로 다른 욕망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의 초상화에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 자화상의 변천이기도 한 것이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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