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만 경주시민들은 뭐든 하면 안 된다는 '만성 피해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시민들은 천년고도 경주가 정부와 정치권의 '정치놀음의 장'으로 변질됐다고 분개했다.
◇분노와 실망
24일 오후 경주 보문단지. 40, 50대 남자 3명이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경주에 뭐 되는 게 있어. 타 시도 친척들이 경주는 왜 그리 시끄러워라고 말해. 해놓은 것은 없고 경주 인상만 나빠졌어."(시민 김정규씨) "정치인 등 외부 사람들은 '천년고도'라는 경주의 겉모습에만 관심을 가졌지 천년고도 때문에 시민들이 고통받는 실상은 전부 외면하고 있어. 외부인들의 '속 모르는 소리'에 이젠 지쳤어."(40대 남자) "국책사업이라도 유치하려고 발버둥쳤지만 힘만 뺐어. 정부가 벌집만 쑤셔놔 경주엔 시민들의 반감과 분란만 남았어."(이수관씨)
경주시 손곡동. 1992년부터 2001년까지 경마장 건설이 추진됐던 곳이지만 문화재가 쏟아지는 바람에 경마장 유치가 무산됐다.
그 후 손곡동 경마장 부지는 '폐허'와 다름없었다.
나무를 베고 포클레인으로 땅을 민 흔적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했다.
주민 최경일(63)씨는 "경마장 건설이 무산되면서 마을 전체가 죽어가고 있다"며 "뿌리를 지키려는 200여 명의 60, 70대 주민들만 남아 있을 뿐 지난 5년 간 아기 울음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근 보문관광단지개발지구에 묶여 30여년 간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아왔던 주민들은 사적지 지정으로 이중 규제에 묶이면서 대부분 고향을 등진 것이다.
최씨는 "차라리 경마장 건설이 추진되지 않았더라면 이중 규제에도 묶이지 않았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시민들은 국책사업의 '국'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무엇이 이들을 화나게 했나
경주가 10여년 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태권도공원, 축구센터, 경마장, 카지노 등의 국책사업 모두 경주를 비켜갔고, 겨우 유치한 고속철 역세권 개발도 축소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달 무주로 넘어간 태권도공원은 경주의 민심을 최악으로 몰고갔다.
경주시에 따르면 태권도 공원 조성사업은 2000년 9월 중단됐다가 지난해 4월 재개됐고, 발표 불과 2달 전에 평가지침이 내려왔다는 것. 부랴부랴 시는 태권도공원 유치에 들어갔지만 무주에 7.66점 차이로 탈락했다.
문제는 태권도공원 선정 평가 내용이 시민들에게 적잖은 의혹을 남겼다는 점이다.
태권도공원 경주유치추진위원회에 따르면 경주는 1차 평가(900점 만점)에서 무주와 1.5점 차이로 1위를 차지했으나 2차 평가(100점 만점)에서 무주에 9.16점 차이로 크게 뒤졌다.
추진위는 △1차는 잣대가 분명한 정량적 평가인데 반해 2차는 잣대가 없는 평가여서 객관성에 의문이 있고 △2차 평가의 주요 내용인 부지 적합성, 광역 연계성, 국토 균형발전, 지자체 역량 등은 이미 1차에서 평가가 끝난 항목이라고 밝혔다. 더욱이 △1차에서 경주가 무주보다 높게 평가된 항목은 2차에선 반대로 경주가 낮게 평가됐고 △1차에서 경주가 무주에 뒤진 항목은 2차에서 다시 감점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
발표 후 추진위는 문화부에 심사 과정을 밝혀 줄 것을 요구했고, 문화부의 답변이 없자 문화부를 상대로 무주 태권도공원 행정집행정지 가처분 및 증거보전신청을 서울 행정법원에 냈다. 사정이 이렇자 문화부는 인터넷을 통해 상수도 공급 원할, 하수처리비 저렴 등을 무주 선정 이유로 밝혀 경주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추진위 최암 위원장은 "태권도공원 선정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됐던 정치적 흥정에 결국 경주가 희생된 것"이라고 했다.
같은 날 발표된 축구센터도 경주는 '들러리'가 됐다.
경주시 김범식 체육관리담당은 "경주는 천연잔디, 인조잔디 등 11개의 축구장과 주변 관광지 등의 인프라가 잘돼 있음에도 창원에 축구센터를 준 것은 납득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관광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지난해 추진한 카지노 운영권 유치도 시민들의 힘만 뺐다.
시민들은 지난해 보문관광단지와 조성 중인 감포해양관광단지에 카지노장을 설치해 줄 것을 문화부에 건의했으나 문화부는 지난해 9월 외국관광객이 많은 서울과 부산에 카지노를 내준 것.
경마장도 시민들에겐 뼈아픈 상처다. 경마장은 1992년 당시 대통령 공약 국책사업으로 발표됐고, 정치논리에 오락가락했지만 부지 매입비 등으로 경주시와 마사회가 334억 원의 거액을 투자, 시민들은 개장만 기다렸다. 하지만, 2001년 4월 부지가 사적지로 지정되는 바람에 돈만 날리고 부산으로 넘겨줬다.
또 시민들은 한때 고속철 경주역사를 유치했다고 자랑했지만 '고속철 역세권 개발 축소 위기'에 실망하고 있다. 경주에서 자동차로 30분 남짓한 울산에 고속철 역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역세권 개발 프리미엄이 동강날 처지라는 것. 게다가 역세권과는 10분 거리에 위치한 태권도공원 후보지 개발과 연계할 계획이었으나 태권도공원 유치가 날아가 사업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커져가는 분노
분노는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 8일 경주 청년연합회 주관으로 시민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청 옆에서 태권도공원 재심사 궐기 대회가 열렸고, 26일에는 경주시의회 의원 13명이 태권도공원 선정과 관련해 문화부를 항의방문했다.
내달 2일에는 시민 3천여 명이 참가하는 핵 대책 시민연대 신월성 원전 건립 반대 시위가 예정돼 있다. 전국 저·고준위 핵폐기물의 51%를 차지하는 경주에 더 이상 월성 원전 추가 건설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핵대책 시민연대 관계자는 "신월성 원전은 세계적 유적지인 문무대왕릉과 불과 1㎞ 이내에 위치한 곳"이라며 "문화재 출토 때문에 경마장 건립을 무산시킨 정부가 매장문화재가 출토된 곳에 신원전 건설을 왜 강행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주문화재피해시민대책위원회와 경주경제살리기범시민연합회 등 48개 시민단체들도 3월 수천 명이 참가하는 고도보존법 시행 반대 시민 총궐기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기획탐사팀 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경주 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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