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은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 마음 한켠으론 가벼운 설렘이 일기도 하지만 요즘의 설은 바쁜 일상에 밀려 예전같은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고향의 모습도 매년 달라져 정겨운 고샅길엔 시멘트가 깔리고 흙담장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연휴기간 중 본격적인 관광이나 여행을 가기란 쉽지 않다. 고향길에 우리 민족의 전통과 얼이 깃던 민속마을로 발걸음을 옮겨보면 어떨까. 기와집과 초가가 어우러진 고즈넉한 길을 걸으며 조상들의 풍속과 유물을 돌아보는 것도 새로운 감회에 젖게 하는 설 연휴 여행이 될 수 있다.
◇경북 북부
▲안동 하회마을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위치해 있는 하회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정도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유림의 고장 안동땅의 지체 높은 양반문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낙동강 줄기가 몸을 비틀며 굽이치는 강변에 150여채의 고가들이 옛모습을 지키고 있는 정경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조선시대 쯤으로 돌려놓은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토담 너머로 금방이라도 갓 쓴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그런 고즈넉함이 배어 있는 곳이다.
하회탈 등 국보 2점, 양진당과 충효당 등 보물 4점, 북촌댁 등 민속자료 10점 등 수많은 문화재가 남아있다. 고가 하나 하나가 모두 문화재로 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 그 중 눈여겨 볼만한 건물은 양진당과 충효당. 양진당은 입암 유중영의 고택이다. 사랑채는 고려건축양식이고 안채는 조선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서애 유성룡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충효당은 조선 중기 전형적인 사대부집.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 등 50여칸이 남아있다.
이밖에 북촌댁, 주일재, 작전고택, 하동고택 등 집마다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하회마을 입구에는 국내외 탈 300여점이 전시돼 있는 탈박물관도 들를만 하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숨겨진 보물처럼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다. 병산서원이 바로 그곳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 정승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병원서원은 하회마을에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병산서원의 가치는 건축의 아름다움에 있다. 건물 하나하나도 뛰어나지만 동서 35m, 남북 73m의 공간 속에 짜임새 있게 배치된 만대루와 입교당, 존덕사는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최고봉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건물의 관리 상태도 매우 좋아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봉화 닭실마을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어서 '닭실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실제로 100여호의 가옥이 들어선 마을은 산자락에 포근하게 둘러싸여 있다.
닭실마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충재 권벌이 입향조인 권씨 집성촌이다. 마을엔 고풍스러운 모양의 안동 권씨 종가집이 있다. 종택에는 반달형 월문과 정자 청암정 등이 볼거리. 특히 연못 한가운데 거북모양의 바위 위에 지은 정자 청암정이 시선을 끈다. 층재기념관에는 충재일기, 연산일기, 세초도, 근사록 등 40여점의 문화재가 보관돼 있다.
마을을 끼고 흐르는 석천계곡도 들러볼만한 곳. 계곡물은 얼어 있지만 계곡 주변의 울창기가 꺾이지 않는 소나무숲과 정자 석천정은 한겨울에도 기가 꺾이지 않는 고매한 선비정신의 일단을 만나보게 해준다.
닭실마을은 또 제사 때 쓰는 한과로도 유명하다. 문중 부녀자들이 500년간 전해 내려온 방식으로 한과를 빚는다. 쌀 튀밥으로 고명을 얹고, 고추실로 문양을 넣어 한과를 빚는다.시중 한과와 달리 닭실 한과는 아삭아삭 씹히면서 고소한 뒷맛을 남겨 인기다.
▲무섬마을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육지속의 섬'이다. 수도리라는 이름 그대로 영주에서 흘러온 영주천과 예천을 비껴 흐르는 내성천이 마을의 3면을 감싸 안고 흐르고 있다. 그 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동네가 바로 무섬마을이다.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은 휘감아 도는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지며 맞은편에는 소나무,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룬 나지막한 산들이 강을 감싸안고 이어진다. 이처럼 유유히 흐르는 강과 정겨운 자연, 고풍스러운 옛집이 즐비한 무섬마을은 고향을 찾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기에 괜찮은 곳이다. 반촌의 고즈넉한 고샅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체취와 삶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마을엔 예안 김씨와 반남 박씨 두 집안사람들이 살고 있다. 가옥이 도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으나 현재 해우당, 만죽재 등이 복원돼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인 만죽재는 반남 박씨 입향조인 박수 선생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건립한 집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해우당 고택은 조선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락풍 선생이 건립하였다. 경북 북부 지방의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으로 앞의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사랑과 아랫사랑을 두었다. 특히 우측의 큰 사랑은 지반을 높여 원주에 난간을 돌려 정자처럼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를 꾸몄다.
▲선비촌
선비촌은 부석사 가는 길 영주시 순흥에 지난해 개장한 테마마을. 병풍처럼 둘러선 소백산과 맑은 죽계천이 이웃한 영주 선비촌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과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을 통해 전통의 뿌리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선비촌은 총 1만7천여평의 규모로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경북북부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고택과 정자, 성황당 등을 이건하거나 본떠 만든 민속촌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과 초가 등 12채의 숙박동과 강학당, 정자, 누각, 원두막, 상여집, 그리고 저잣거리까지 모두 40채의 옛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정연한 골기와를 얹은 기와집에 남정네들의 생활공간인 사랑채, 여인네들의 공간인 부엌, 대청마루, 초가와 저잣거리가 잘 재현돼 있다. 선비촌에는 2만여점의 유물을 전시한 소수박물관도 있다.
◇경북 동부
▲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 마을의 전통이 잘 보존돼 있는 민속마을이다. 경주의 문화유산 대부분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비해 양동마을은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나지막한 설창산을 배경으로 150여채의 고풍스런 가옥과 15개의 정자.비각.강학당 등 조선시대의 전통가옥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양동마을은 500여년전인 조선 초기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가 처가를 따라 입향해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에는 관가정, 무첨당, 대성헌, 수졸당, 낙선당, 서백당, 사호당, 상춘헌, 심수정, 동호정 등 200년 이상 된 고가만 50여채나 된다. 1984년 동네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눈길을 모으는 곳은 월성 손씨의 종갓집인 서백당과 여강 이씨의 종갓집인 무첨당, 99칸의 위용을 자랑하는 향단(香壇) 등이다.
양동마을은 위세 높은 대종갓집일수록 높고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 하인들의 집이 있는 것도 눈여겨 볼만한 특징이다.
▲영덕 종갓집마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는 국내에서 종가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예전에는 소안동으로 불릴 정도로 양반들이 많이 몰려있던 곳이다.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과 삼은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 나옹화상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100~500년 된 고가 20여채가 남아있다. 재령 이씨 집안의 충효당과 사임재, 야성 정씨의 고택으로 평산 신씨 집안이 사들인 만괴루, 효자 이시형의 우계종택이 있고, 무안 박씨, 대흥 백씨 등의 종택도 있다.
인량리에서 10여분 거리인 영해면 괴시리에 있는 영양 남씨 집성마을도 들를만한 곳이다.
◇경북 서부
▲성주 한개마을
경북 성주군 월항면에 위치한 한개마을.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이주해 오면서 마을을 이룬 성산 이씨의 집성촌이다. 영취산을 끼고 100여채의 전통 고가옥이 남아있다.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으로 끝까지 절의를 지킨 이석문, 조선 말의 유학자 이진상 등 이름난 선비가 많이 나온 마을이다.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그리는 마음에 북쪽을 향해 사립문을 냈다는 북비고택을 비롯해 구 한말의 성리학자 이진상이 학문을 갈고 닦던 한주종택, 20세기 초 목조건물의 면모를 보여주는 월곡댁, 마을에서 가장 오랜 내력을 지닌 교리댁 등이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돌담과 고택들에서 예스런 멋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최재수기자 bio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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