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손자얼굴 늘 보고 살았으면…"

아기 울음소리 끊긴 농촌 설맞이 표정

지난 3일 오후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 마을회관. 할아버지 할머니 30여 명이 애들처럼 들떠 있었다."새돈 바꿨어, 강정과 떡도 만들어야지, 손자·손녀 줄 때때옷 사러 영양장에 가자구, 마을 길도 쓸고, 집안 대청소도 해야지."

남대흠(75)씨는 "1년 중 설과 추석이 가장 기다려지고 기쁘다"며 설렜다. 안만종(67)씨는 "명절 때는 마을에 차가 꽉 차. 옛날 영양읍쯤 될 거야"라고 했다. 벌써부터 동구밖 길을 서성이고 있는 조정용(74)씨. 조씨는 6년 전 부인과 사별했고, 노모 수발을 끝낸 4년 전부터는 줄곧 혼자다. 2남 4녀를 뒀지만 모두 출가하거나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명절은 외로움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날이라고 했다.

조정석(72)씨는 "1년 중 설과 추석 딱 이틀만 즐겁지, 자식 손자들 다 떠나면 마을은 다시 적막강산이야." 취재팀이 설을 앞두고 지난 1일부터 4일간 돌아본 경북의 농촌마을은 우리가 자라고 뛰놀았던, 언제든 달려가고픈 옛 고향이 아니었다. 모두 떠나고 빈집, 빈 땅, 폐교, 노인 그리고 노총각들만 덩그런 농촌을 지키고 있었다.

의성군 사곡면 공정2리 삼학마을.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 마주친 주민도 모두 '노인' 뿐이었다. 경로당에서 만난 오원섭(74)씨는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44세 노총각"이라고 했다.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 4만 평에 달했던 전체 농지는 8년 전보다 딱 반으로 줄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어. 집에서 조금만 멀어도 농사를 포기하는 거지." 이종한(69)씨는 "조상 대대로 일궈 온 토지가 4, 5년 내 몽땅 사라질 운명"이라고 개탄했다.

공정2리는 사곡면 20개 리 통틀어 노인 인구 비중이 가장 높은 곳. 주민등록상 인구 57명 중 27명(47.3%)이 65세 이상 노인이다. 하지만 실제 노인 비중은 이보다 훨씬 높다. 10년 전부터 마을 곳곳에 5, 6곳의 폐가가 생겼지만 지금껏 한 채도 팔리지 않아 여태 주민등록이 남은 것이다. 이종휘 이장은 "상주 인구는 37명밖에 되지 않는다"며 "10대 2명, 40대 2명, 50대 2명을 제외하면 모두 60세 이상 노인"이라고 했다.

의성군 사곡면사무소 인근 사곡중학교는 지난해 32년 역사를 마감했다. 운동장은 배추밭으로 변해 있었고 '1972년 3월 1일 개교해 지금까지 3천11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는 교적비만 텅빈 옛 교정을 지키고 있었다. 100m 떨어진 사곡초교도 폐교 직전. 80년대 800여 명에 달했던 학생 수가 지금은 27명으로 줄었다. 1·2학년, 4·5학년, 3·6학년 3학급뿐이다.

영주시 평은면 용혈2리. 마을에서 5분 거리인 용혈분교 학생은 정수(10), 경수(8)형제뿐이다. 한창 때 50가구 200여 명이 넘었던 마을은 25가구, 27명만 남았다. 진작에 폐교됐어야 할 용혈분교엔 남모를 사연이 많다. 정수·경수 형제의 엄마 김태연(31)씨는 "걸어서 30여분 거리에 본교가 있지만 아이들이 다니기엔 길이 너무 험해 통학버스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나마 교통 사정이 나아지면서 승용차 통학은 가능해졌지만 이번엔 마을 주민이 폐교를 반대하고 나섰다. 서찬식(63)씨는 "학교마저 없어지면 수백 년을 이어 온 마을이 통째로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같은 날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일대. 사람이 사는 곳보다 빈집이 더 많았다. 청량산을 둘러싼 북곡리를 승용차로 30분 헤맨 끝에 겨우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북곡리 내 갈평지마을 정중원(63)씨는 "10년 전엔 100가구 이상이 고랭지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10가구도 안된다"고 했다. 10년 전부터 10~20가구 규모의 옥산, 한티, 운산 마을이 차례로 사라졌다. 20여 가구가 모여 살았던 갈평지 마을에도 4가구만 남았고, 인근 산성마을엔 단 한 채만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고, 한 집 건너 빈집이 많은 북곡리는 건설교통부의 최근 공시가격 조사에서 갈평지 마을 일대의 빈집 두 채가 나란히 전국에서 가장 싼 집 1, 2위를 차지했다.경북도에 따르면 1981년 317만6천 명에 달했던 경북 인구는 2003년 274만2천 명으로 줄었다. 울릉군 경우 전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시군으로 인구가 1만 명도 안됐다(2003년 9천252명). 인구 6만8천 명의 의성군은 65세 이상 노인이 1만6천145명에 달해 전국에서 가장 노인 비중(23.61%)이 높은 시·군이다.

기획탐사팀=이종규·이상준기자

청송·영양 김경돈 군위·의성 이희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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