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속의 설-'설날의 추억'속으로…마음은 흐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유명한 전혜린이 지난 1959년 우리말로 번역,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미륵의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는 작가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유창하고 활달한 문체로 그려져 있으며, 깊은 영혼의 울림과 향수가 아름다운 운율로 묘사돼 있다. 특히 '습자지로 만든 연(鳶)'과 '즐거웠던 설놀이'에는 20세기 초 우리의 명절 설 풍습과 가족이야기, 소년시절의 즐거움이 잘 녹아 있다. 먼 이국 땅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독일어로 아름다운 글을 쓴 작가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다시 읽어본다.

압록강은 흐른다

이 미 륵

수암은 큰사랑방 곁의 작은방에서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기다란 대나무를 가느다랗게 쪼개어 날이 새파랗게 선 칼로 반반하게 될 때까지 말끔히 다듬고서, 정서를 하여 둔 습자지에다 동그란 구멍을 내고 그 밑에 나비를 그렸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대나무 살과 종이에 풀칠을 해서 말린 다음 연을 만들었다.

우리는 집 앞의 성벽을 타고 아이들이 연을 띄우는 것을 자주 보았고, 그런 연을 오래 전부터 무척 가지고 싶었다. 우리는 이런 욕심마저 다른 많은 것과 함께 부모님에 의하여 금지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의 연을 잘 살펴본 수암은 제 스스로 그 연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연방 재주 있는 사촌의 솜씨를 경탄하면서 연이 하늘 높이 올라갈 것이 사뭇 즐거워 곁에서 그를 거들어주었다.

이튿날 우리는 뒤뜰에서 몰래 첫 실험을 했다. 그러나 연은 올라가기는커녕 자꾸만 땅바닥으로 처박히기만 했다. 수암이 실끝을 잡아맨 반대 방향으로 되도록 빨리 달릴 때마다, 나는 몇 번이나 연을 높이 던져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은 띄워지지 않았다. 풀이 꺾인 수암은 전의 것보다 더 엷은 대나무 살과 얄팍한 종이로 다른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띄워지지 않았다. 수암은 차례차례로 자꾸만 새것을 만들었다. 종이는 많이 있었다. 매일 글을 배울 때마다 석 장의 새 종이를 받기 때문에 그 중의 두 장은 글을 썼지만 나머지 한 장은 연 만드는 데 쓰고 있었다. 그런데다 작은방에는 수많은 종이 뭉치가 있었으므로 그는 종종 그 종이를 썼던 것이다.저녁에는 이 방에 아무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일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노곤하고 약간 실망한 채 내 방으로 돌아와버렸다.(중략) 얼마 후였다. 우리 고장에서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설이 가까워졌다. 한밤중에 조상의 신주 앞에 제사를 드린 뒤에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큰 안방에 불려가서는 맛있는 과일을 대접받았고, 우리들이 앉아 있고 싶은 대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우리는 고운 옷으로 치장하고 온 친척집과 이웃집에 세배를 드리러 갔다. 날씨는 꽤 차가웠다. 길바닥은 얼음장처럼 얼어붙었고 칼날 같은 바람이 마구 휘몰아쳤으나 우리들은 신이 나서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그리고 잘 왼 세배의 말들을 가는 곳마다 옮겼다. 어디에서나 따뜻하게 맞아주었으며 단 과자와 과일을 대접받았다. 기쁘고 우스운 이야기를 듣고, 맛있는 음식만을 먹을 수 있는 그런 명절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우리 집은 할머니를 비롯하여 구월에 이르기까지 모든 식구가 좋은 옷을 입었다. 아무도 찌푸린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마름으로 있는 둔한 순옥까지, 여느 때는 나를 무능하다고 비꼬았으나, 이날만은, "언젠가 너도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다정스레 말해 주었다. 모든 사람이 농을 걸었고 선물을 주었다.

밤늦게 잠자리에 들려 했을 때-나와 수암은 일년 전부터 한방에서 잤다-앞으로 보름 동안 방학이 계속된다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수암은 벌써 코를 골고 있었다. 아이들 다음으로 어른들이 세배하러 갔다. 수많은 이웃 사람과 계집아이, 부인, 청년과 노인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고, 집안은 기쁨과 웃음으로 가득 찼었다. 이렇게 명절이 하루하루 계속되었다. 내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명절 기분에 잠겨 있는 동안 수암은 저녁이면 몰래 집에서 빠져나가 늦게야 돌아왔다.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까불이 패들과 새해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호사스러운 그의 옷은 온통 흙 발자국과 코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는 아무도 몰래 그것을 모두 지웠다. 그러나 한번은, 다른 날보다도 더 실컷 맞아서는 들어왔다. 양소매는 절반쯤 찢겨 있었고 머리에는 여러 군데 타박상을 입었다. 그는 적들한테 에워싸여 아주 호되게 두들겨 맞다가 끝판에야 동무들이 말렸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투쟁욕을 줄게 한 것 같았다.

이튿날에도 싸움은 더 거칠어졌고 며칠 후에는 결판이 날 판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그 대신 집안에서는 다른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 셋이 다투게 된 이 싸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가 일으킨 분란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저녁,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우리를 불러 이상한 놀음을 가르쳐주었다.딱딱하게 생긴 종이 한 장에는 가장 높은 고관에서부터 제일 말단 관리에 이르는 직명이 쓰여 있었다. 우리들은 우리 경력을 가장 낮은 단계에서 시작하여 판서의 직위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놀음에 이기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책을 들고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폈다. 그래서 나오는 면의 첫 글자가 운(韻)으로 선정되어 우리들 모두는 이 말로 끝나는 어떤 고전적 시인의 시를 말하여야만 했다.

먼저 칠성이 부딪힌 첫 글자는 '군(君)'자였다. 그는 이 글자로 끝나는 시를 하나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오랫 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는 수암의 차례가 돌아왔다. 수암의 운자는 봄 '춘(春)' 자였다. 그건 아주 보편적인 운자였으므로 우리는 수암을 부러워했다.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봄이 깃든다.""잘했다."

아버지는 그를 문관의 지위에 진출시켰다. 그것은 수암의 큰 성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수암에게는 최고요 최후의 성과였다. 그는 그와 같은 운수 좋은 운자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급할 수가 없었다. 수암은 여태껏 단 한 권의 시집만 읽었을 뿐 아니라 그것마저 완전히 기억하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칠성과 나도 곧 진급이 멎어버렸다. 그는 제 삼에, 나는 제 사에 진급에 머물러 있어서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

며칠 뒤에 우리들은 그 놀음을 다시 계속했다. 이번에는 시인의 내기가 아니고 쌍윷 기술에 의한 것이었다. 칠성은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들은 모두가 관리가 되었고, 계속해서 진급되었으며 놀음은 반 시간 뒤에 끝이 났다. 각 놀음에 동전이 걸렸다. 이 놀음을 찬성하지 않던 아버지도 나중에는 우리를 도와주어서 각개 관리의 지위와 권력이며, 현실에 있어서 그러한 지위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관한 설명을 아주 재미있게 해주었다.

이미륵(1899~1950)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이미륵(사진)은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의경(李儀景)으로, 미륵은 아명이다. 1917년 경성의학전문에 입학,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반일(反日) 전단을 뿌리는 등 학생활동 주동자로 활동하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일을 돕다가 1920년 독일로 유학, 뷔르츠부르크'하이델베르크대에서 의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1928년 뮌헨대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부터 '다메(Dame)'지에 '하늘의 천사'를 처음으로 발표한 후 단편적인 작품에 동양의 전통적 정서와 서정을 섬세하고 담백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일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46년 출간한 그의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는 전후 독일문단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소설의 일부는 독일 고교 교과서에 실려 독일 학생들에게도 애독되었다. 1947년부터 뮌헨대 동양학부에서 강의한 그는 1950년 3월 위암으로 타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뮌헨 교외 그래펠핑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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