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어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차례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죠."
지난 9일 설날 아침 집집마다 차례를 지내느라 바쁜 시간, 송인환(42'영남대 의대 교수)'구민향(38)씨 부부는 먼 나라 미국에서 대구에 계신 부모님께 국제전화로 문안 인사를 드렸다. 외아들이어서 직접 차례 준비를 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지난해 7월 미국 클리블랜드에 있는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대 연구교수로 떠나 지난 추석도, 올 설도 미국에서 명절 기분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기만 했는데 어느새 미국 생활을 한 지도 7개월이 다 돼 가네요." 두 아이와 함께 2년간 클리블랜드에서 지낼 예정인 이 부부의 미국 생활은 한마디로 도전이요 모험이다. 미국에 간 지 열흘 만에 렌터카를 몰다가 교통신호를 위반해 경찰에게 딱지를 끊길 뻔한 일부터 모든 것이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처럼 별 생각 없이 운전했는데 미국의 경우 차량 통행이 많은 교차로에서는 우회전 차로에서도 빨간 불일 때 우회전해서는 안 되는 곳이 많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요."
아이들 스쿨버스 시간 변경이나 회의 시간 등 학교 전화에 긴장하고 가게 점원의 친절한 수다를 알아듣지 못해 멋쩍은 미소로 답해야 할 때가 부지기수였다. 세금 관련 영수증과 공지사항이 담긴 학교 우편물을 영어사전을 동원해 독해하고 휴대전화 신청, 통장 개설, 인터넷 가설, 자동차 보험 가입을 위해 이웃에게 SOS를 쳐야 할 지경이었다.
"미국에서의 일상도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아요. 오전 7, 8시 남편과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오후 3, 4시엔 아이들이, 오후 6시엔 남편이 돌아오지요." 구민향씨는 어느 정도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니 일상생활이 한국에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일이 하나 덤으로 늘었다. 하루 7시간 영어의 바다에 풍덩 빠져 있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부부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미국 학교 숙제뿐만 아니라 한국 학교 공부도 봐줘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현석이는 제가, 6학년인 첫째 민재는 남편이 도와주느라 매일 저녁 영어 단어와 씨름을 합니다. 두꺼운 책을 일일이 해석하며 작문, 단어 암기, 문제 풀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전자사전을 눌러가며 독해를 하느라 짧게는 30분, 길게는 3시간이 걸리기도 하지요."
다행히 한 학기가 지나고 나니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면서 스스로 해결하는 과제물이 늘고 있어 대견하단다. "외국에만 보내면 영어는 저절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지만, 미국의 학교 생활은 영어만 배우는 한국의 영어학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전문용어가 필요한 학과 과정을 따라가야 하고 발표, 글쓰기, 시험 등 한국 학교와 똑같은 집중력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론 심술궂고 무심한 몇몇 아이들을 이겨내야 하고 은근한 인종 차별도 무시할 줄 알아야 하지요."
이들 부부는 "아이의 영어 교육을 위해 따라온 기러기 엄마의 로맨스가 심심찮은 가십거리가 된다"며 "미국 교포사회에서는 한국의 조기유학 열풍에 대해 많은 우려를 보이고 있다"고 전한다.
"그만큼 외국생활이 외롭고 힘들다는 이야기지요. 중요한 자아 형성 시기에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문화가 다른 이국 땅에서 생활하는 아이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합니다. 뚜렷한 목표의식이나 철저한 준비 없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떠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워요."
이들 부부는 ABC도 모르는 아이를 미국에 데려와 학교에 보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교실에서 7시간 동안 혼자 보내야 했던 아이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는 이민 온 한 아줌마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부모의 끝없는 관심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 부부는 부모와 같이, 또는 아이 혼자 어학 연수나 조기 유학을 보내더라도 한국에서 영어를 잘하도록 미리 교육시키는 것이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마흔이 넘은 경상도 남자가 말도 잘 안 통하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송씨. "퇴근 후 술 한 잔 하고 싶어도 먹을 상대도 없고 먹을 장소도 마땅찮아 피로를 푸는 일이 쉽지 않다"며 웃음 짓는다.
이들 부부는 생활비와도 전쟁을 치러야 한다. 미국에서는 공산품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비싸기 때문이다. 미용실, 세탁소, 카센터처럼 노동력과 기술이 필요한 일은 우리나라의 서너 배가 넘는다. 이에 비해 식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지만 미국 음식은 입에 안 맞아 비싼 수입품(한국식품)을 사 먹어야 하니 그 돈 또한 만만찮다. 그래서 효율적인 지출에 더욱 신경을 쓰다 보니 이들 부부는 할인 쿠폰 챙기는 일에 도사가 됐다고 한다.
"그래도 짬을 내 떠나는 미국 여행은 재충전은 물론 소중한 체험으로 우리 가족을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클리블랜드에서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을 자주 볼 수 있는 일도, 기본 원칙의 고수를 중시하는 미국 사회,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며 지도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미국 학교 교육을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실질적으로 필요한 정보가 너무 부족한 데 놀랐다고 말하는 이들 부부는 '민들레홀씨(http://minhyang.hihome.com)'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출국 준비부터 미국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을 계속 올리는데 열심이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사진: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눈 구경을 실컷하고 있다는 송인환씨 가족. 미국 생활에 대한 정보를 홈페이지에 자세히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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