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빙글빙글 돌아가는 청홍백색의 이발관 표시등. 연탄난로에 철사줄 또는 빨랫대에 걸려 있는 빨갛고 파란 체크 무늬 수건. 크고 작은 가위와 여러 가지의 빗, 면도기 등 이발기구들이 꽂힌 헝겊주머니. 포마드 크림 등 각종 머릿기름….
배우 송강호가 열연한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 나오는 옛 추억 속의 60, 70년대 이발소 풍경이다.
경산시 진량읍 부기리 '복지이발소'는 이런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주인은 올해로 이발경력 47년째인 이위태(60)씨.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서 오이소'하는 이씨의 목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30, 40년이 넘어 일부는 헤어진 의자 2개와 대형 거울이 낯설지 않다.
한쪽에는 요즘에는 보기 힘들어진 면도칼을 가는 낡은 가죽 혁대가 걸려 있다.
시멘트에 타일이 박힌 세면대와 머리 감길 때 쓰는 물조리도 반긴다.
세면대 위로는 1963년도 '이발 료금표'와 60, 70년대 빗바랜 흑백사진 액자가 걸려 있다.
마치 세월을 30,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이발 박물관을 보는 듯하다.
해방 이듬해 경북 월성군 산내면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가정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씨는 가난 때문에 외가인 경산 용성으로 이사를 해야했고 학교는 초등학교 1학년만 다녀봤다.
그가 '가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3세 때. 지금은 도로가 나면서 없어진 '부창이발소'에 '보조'로 취업을 했다.
60년대만 해도 이발사는 사진·양복과 더불어 미래가 보장되는 기술직으로 누구나 선망했다.
월급은 고사하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명절 때 양말 한켤레 사주면 고맙고 이발기술 가르쳐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던 시절이다.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있어서 그런지 '보조' 3년 만에 이발 가위를 잡았습니다.
기술자가 되었으니 이제 밥은 빌어먹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에 밤잠이 안왔죠."
힘든 일과를 마치고 난 뒤에는 인근 부림초등학교에 있던 야학에서 글자며 숫자며 구구단을 익혔다.
이씨는 "당시 이발요금은 10∼15원, 쌀 한되 정도였는데 현금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수확철에 보리쌀이나 쌀 몇 말 등 곡식으로 받았다"며 "가족 모두 먹고 생활하고 1년에 땅 한 마지기는 살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했다.
이씨는 1962년 이발사 면허증을 딴 뒤 경산 압량·용성 등을 거쳐 대구·경기도 파주·서울·부산 등 전국 여러 이발소를 돌아다녔다.
시쳇말로 '스카우트'된 것이다.
22세 때 이발병으로 군에 입대한 뒤에는 월남에 파병돼 장교들의 머리를 손질했다.
가끔씩 월남인들의 머리도 이발해주기도 했다
26세 때 부인 전덕남(58)씨와 결혼한 뒤 영천군 대창면 신광리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발관을 열었다.
머리를 깎고 간 손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전해져 사방 10리에서 손님이 찾아올 정도로 영업이 잘됐다.
이곳에서 번 돈으로 29세 때 자신이 일했던 진량 부창이발관을 32만 원에 샀다.
보조로 일하다가 16년 만에 그 이발소의 주인이 된 것. 감회가 새로웠다.
그의 이발소에는 1963년 대한환경위생협회 경산분회에서 고시한 이발요금이 벽면 액자에 그대로 남아 있다.
조발 25원, 면도 15원, 염색 60원, 드라이야(드라이)는 10원. 현재의 요금 7천 원과 비교하면 무려 280배나 올랐다.
요금이 자율화된 90년대 후반까지 협회의 요금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소중한 자료인 셈이다.
"60, 70년대만 해도 머리에 서캐가 허옇게 있었지요. 머리 밑에는 쇠똥이 깔려 있고 철빗으로 이와 쇠똥을 훑어냈을 정도였으니까. 지금 애들한테 이야기하면 거짓말이라고 하겠죠."
그는 자신의 이발소를 가지게 되면서부터 이발기술로 봉사해오고 있다.
어려운 학생들과 노인들은 무료였다.
도로 확장으로 부림이발소가 헐리면서 부림초교 앞에 낸 새 이발소 이름도 '복지이발관'으로 바꿨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복지를 베풀겠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지금도 이발소 옆에 3평 정도의 천막을 쳐놓고 어른들이 쉬면서 물 한모금, 소주 한잔 들고 갈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씨의 이발소 거울이나 벽면 곳곳에는 그가 쓴 세월 사는 이야기인 '나의 사람과 신조'라는 글과 여러 가지 글귀가 붙어 있다.
'웃으며 살면 복이 온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
과분한 욕심은 패가망신한다' 등등. 이발소 앞 마당에도 자료로 남기기 위해 자신의 약력 등을 담은 글을 3년 전 비석으로 제작해 세워 두었다.
'스스로 택한 길을/그는 혼자서 걸었다/그러나 그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그리고 그는 돌아보며 후회도 하지 않았다/행복한 사람, 그가 바로 그 사람이다.
' 40년 넘게 단골 손님인 이웃동네 배한포(64) 전 성동초교장이 선물한 글이 그의 인생을 대변하고 있었다.
경산·김진만기자 factk@imaeil.com
사진설명 : 47년째 이발사로 일하고 있는 이위태씨가 60년대 이발요금표와 월남전 당시의 흑백사진 등을 지켜보며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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