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에서 반체제 활동을 한 이들의 삶은 피곤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여타 지역의 운동권 인사들은 사회적 대접을 받았지만 대구.경북에서 운동권 인사는 기피대상이었다.
그렇다고 대구.경북이 보수 일변도는 아니었다. 4.19의거의 불꽃이 점화된 곳도 대구.경북 이었고 이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중심도 대구.경북이었다. 서울을 비롯한 타지역에서는 언제나 대구.경북이 먼저 나서 줄 것을 요구했다. 그만큼 지역의 민주화 역량이 앞섰다. 그러나 대구.경북의 이런 민주화 동력은 유신반대의 선봉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이자 친북반국가 단체로 규정받은 30년전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있고부터 약해진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징역 5년을 살고 나온 이현세(李鉉世. 56)씨는 지역의 변화를 이렇게 평한다. "유신으로 정권을 연장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대구.경북이 앞장 서 자신에 대한 반대운동을 펴는 것에 가혹하게 대응했다. 확정판결 20시간만에 사건 관련자 8명을 처형한 사건은 지역에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운동권은 지역에서 기피 대상이 됐다"
옥살이 후 그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옥중에서 부친상을 당해 외동 아들이면서도 상주노릇조차 못했던 그는 '더이상 나만 좋아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 아예 돈벌이에만 눈을 돌리기로 생각을 고쳤다. '경북대 사대 수학과'라는 간판은 그가 학원 강사로 살아가는 데 충분했다. 부산을 거쳐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연례행사로 이어진 민청학련 관련자끼리의 등산모임을 제외하면 거의 연락을 끊고 살던 그는 지난해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선배들의 부인과 가족들을 만난 뒤 생각을 고쳤다. "사건이후 개인생활에만 안주했던 나는 민주화 운동을 인정받기도 했는데 나보다 더 민주화에 열심이었던 선배들은 여전히 인정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미안해 죽겠더라"고 한다. 그래서 한 일이 인혁당진상조사위원회 결성이었다.
인혁당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재심이 청구된 상태다. 재심 청구의 요지는 '인혁당은 독재에 맞선 반정부단체일뿐 반국가단체가 아니다'는 것이다.
그 자신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것은 "북한방송을 수록한 글을 본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을 제대로 알아야 겠다는 생각에서 북한 방송을 듣고 또 그것을 여럿이 같이 봐야겠다는 생각에서 기록한 일이 당시 법으로는 분명 유죄이겠지만 결코 국가전복을 음모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80년 이후 운동권은 이념적으로 분파되었지만 당시는 좌파라면 운동권내에서도 왕따가 되는 시대였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학원강사를 거쳐 이제 독립된 수학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좋아하는 수학을 어린 학생들과 같이 할 수 있는데다 두 아들, 딸이 데모를 하지 않아도 되는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하면서도 민주화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대구.경북의 공로를 왜 서울이 다 차지하고 대구.경북은 스스로의 활동을 왜 부인하고 외면해야 하는지를 안타까워 한다.
서영관 정치2부장 seo123@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