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울의 향토인들] (8)문화예술계

"고향은 창작의 샘"…작품속에 큰 울림으로

대구는 문화·예술의 자긍심이 살아있는 곳이다.

한국의 위상을 알린 문화·예술인 중에 유독 대구·경북 출신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의 작품 속 고향은 하나의 모태 신앙이다.

장르가 뭐든 간에 소프라노 김영미, 피아니스트 백혜선, 연극인 손진책, 화가 이두식, 현대무용가 이숙재는 누가 뭐래도 '고향 까마귀'들이다.

한국 창작무용을 대표하는 춤꾼 3인방(이숙재·김복희·김영희)이 모두 대구출신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밀물현대무용단을 이끌고 있는 한양대 이숙재(李淑在·60) 생활무용예술학과 교수는 창작무용의 '디바'로 꼽힌다.

유학시절(뉴욕대) 한글의 독창성을 깨달은 그는 91년 '홀소리·닿소리' 공연을 시작으로 매년 한글을 형상화한 창작무용을 만들어 호평받았고, 지난해에는 국어학자에게나 주는 '외솔상'까지 수상했다.

이 교수는 서슴없이 "연어가 물길을 헤쳐 시원을 찾듯, 고향 대구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며 "귀소본능처럼 대구는 내 창작 정신의 모태"라고 말했다.

최근 공연을 끝낸 작품이 '찬기파랑가'일 정도로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창작활동에 여념이 없다.

최근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에 선출된 한양대 김복희(57·金福喜) 무용과 교수의 고향도 대구다.

66년 대구여고를 졸업한 뒤 고향을 떠났지만 여전히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묻어있다.

김 교수는 "6살 때 주위에서 예쁘다며 발레를 배우게 한 것이 인연이 됐다"며 "경북예고 출신 후배와 제자들을 보면 옛 생각이 난다"고 했다.

이화여대 김영희(48·金暎希) 무용과 교수는 31살 나이에 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 안무를 맡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고 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기념 페스티벌에도 참여했다.

'김영희 무트댄스' 대표인 김 교수는 지난해 '2004년 춤 평론가상'을 받는 등 절정기를 누리고 있다.

연극 연출가로는 극단 '미추' 대표인 손진책(58·孫桭策·영주)씨가 있다.

연극배우 김성녀씨의 남편인 그는 지난 20여년동안 'MBC 마당놀이'를 연출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총연출을 맡을 정도로 연극계에서 정평이 나있다.

손씨는 "내가 추구하는 연극의 기본정신은 바로 휴머니즘"이라며 "그 바탕엔 바로 고향인 영주가 창작의 샘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는 고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몇몇 지인과 영주 부석사 인근의 폐교(부석 북 초등)를 구입, '소백산 예술촌'으로 꾸며 놓았다.

연극인으로는 문경출신의 박웅(65·朴雄·본명 박광웅)씨가 있다.

1940년 문경 유곡동에서 태어난 그는 호서남 초교를 졸업한 뒤 집안사정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문경은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해방직후인 9살 무렵, 마을에 주둔한 군인들에게 가면극 '토끼와 거북'을 공연한 것이 첫 연극이었다.

친구들끼리 얼기설기 만든 가면극이었지만 그의 40년 연극인생에 가장 잊을 수 없는 공연이었다고 기억한다.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박씨는 "대구 연극은 다른 지역에 비해 뿌리가 튼튼하고 연극정신이 치열하다"며 "대구 연극의 뿌리는 한국전쟁 이후 연극이 대구에서 가장 빛이 났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했다.

이밖에 정통 사실주의 연극을 지향하고 있는 극단 '성좌'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권오일(73·權五鎰)씨는 영양이 고향이고, 극단 '마임'과 돌체 소극장 대표인 최규호(46·崔圭浩)씨는 김천 출신이다.

서울 대학로에 복합 문화공간인 동숭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김옥랑(60·金玉浪)씨도 대구 출신이다.

미술계에는 손진책의 영주 '불알친구'인 이두식(58·李斗植) 홍익대 미술대학장이 있다.

이 학장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곤충과 들꽃, 산 등은 모두 고향의 추억들이다.

그는 "내 작품 모티브의 8할은 고향을 담고 있다"며 "캔버스 속엔 언제나 고향이 숨 쉬고 있다"고 말했다.

이 학장은 최근 대학배구연맹 회장을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홍대 미대 시절 배구 서클에서 뛴 것이 인연이란다.

그는 "(배구)공이 하늘에서 노닐고 있는 게 아름답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또 점과 선의 파격적인 수묵 추상작업으로 한국현대미술에 새 바람을 일으켰던 서세옥(76·徐世鈺·대구)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화가 중의 하나인 박서보(74·朴栖甫·예천) 홍익대 명예교수는 미단(美壇)의 대표적 원로로 통한다.

음악가 중에서도 고향의 이름을 높인 사람이 많다.

우선 서울대 음대에 서우석(65·徐友錫)·백혜선(40·여·白惠善) 교수가 있고, 국립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이강숙(69·李康淑) 전 총장과 김영미(51·金英美)·박명기(52·朴明基) 교수가 있다.

이강숙 전 총장은 고교시절(경북고 36회) 서울 음대 콩쿠르에서 특상을 받을 정도로 노래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 음대에 진학하면서 음악이론으로 전환, 92년까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옮겨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

이 전 총장은 아직도 자신이 살던 '대구 남산동 733번지'를 기억할 정도로 고향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그는 "대구는 나를 있게 해준 어머니의 소중함을 무의식적으로 일깨워 주는 곳"이라며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서우석 교수는 대구에서 태어나 덕산초등 4학년을 마친 뒤 52년 상경, 경기고-서울 음대를 졸업했지만 아직도 피란시절 대구의 풍경과 버드나무가 많았던 수성못에서 놀던 유년시절을 기억한다고 했다.

67년 안동교대 전임강사로 잠시 귀향하기도 했지만 이듬해 서울 음대로 돌아가 더 이상 고향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피아니스트인 백혜선 교수는 경대사대부속 초등 3학년 때 대구시향과 협연을 가질 정도로 '신동'으로 통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 이름을 따 '종로의원 집 딸'로 통했던 그는 초등학교를 마친 뒤 상경, 15살 무렵(1980년) 보스턴 심포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29살에 서울대 사상 최연소 교수가 돼 화제를 모았다.

백 교수에게 대구는 예술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으로 기억된다.

"당시 대구는 한국전쟁 이후 문화활동이 활발했고 서울에 비해 세련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서울 못지 않은 문화 열기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또 지난해 말 별세한 원로 피아니스트 이경희씨와 방학 때마다 대구에 내려와 하루 10시간씩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던 영남대 추승옥(秋勝玉) 교수(당시 서울 음대생)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백 교수와 5살 때부터 함께 피아노를 쳤던 안소연(安昭姸·세종대 겸임교수)·장복희(張福姬·서울대 강사)씨도 피아니스트로 강단에 섰다.

세 사람은 모두 대구가 고향이고 '의원 집 딸'인데다 미국 유학도 함께 떠났다.

백 교수는 "어릴 땐 라이벌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믿고 위해주는 사이가 됐다"고 했다.

또 유학시절 은사이자 세계적 피아니스트인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학교 변화경 교수 역시 대구 출신이어서 대구는 이들에게 음악의 출발점이자 스승이요, 어머니다.

국립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영미 교수와 박명기 겸임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적 권위의 베로나 콩쿠르와 푸치니 콩쿠르(1979년), 마리아칼라스 국제 콩쿠르(1980년), 파바로티 콩쿠르(1981년)에서 연거푸 우승한 소프라노 김영미 교수는 대구 대봉동 출신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테너인 파바로티로부터 "고음과 저음이 균형 잡혀있고 박동감과 호소력이 풍부한 가수"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세계무대에 한국 성악가의 이름을 드높였고, 정부로부터 문화훈장까지 받았다.

김 교수는 육군 장군이던 아버지(김원일)의 임지(任地)를 따라 출생 후 고향을 떠났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대구산(産)이다.

그는 "일찍 고향을 떠나 절절한 느낌은 없지만 대구에 대한 자부심을 언제나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페라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박명기 교수는 대건고-계명대 성악과를 졸업한 뒤 81년 서울시립오페라단(현재 제작감독)에 자리를 잡았고 이후 '아이다' '돈 카를로' 등 수십 편의 오페라를 제작·감독했다.

박 교수는 "대구는 교회와 함께 모태신앙과 같은 곳"이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현악반이 있었던 대건고에서 관악과 현악을 모두 접할 수 있었던 것이 나중 지휘자로 발돋움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했다.

김태완기자 kimch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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