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 언제 와요." "그래, 엄마가 다 나으면 곧 올 거야."
경북 봉화군 명호면 황새마을에 사는 은지(9·여)와 성진(8)이. 은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엔 엄마의 그림자가 '고여' 있다.
"엄마 얼굴이 기억나요. 얼굴이 동그랗고, 머리는 저처럼 단발머리예요. 은지는 엄마를 닮았어요."
은지의 손에는 최근 엄마가 보내준 편지가 꼭 쥐여 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알파벳만 편지에 빼곡했지만 은지는 편지를 통해 엄마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다. 은지와 성진이는 한국인 아빠와 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흔히 말하는 '코시안'이다. 은지는 5세 때인 2001년 봄, 엄마와 헤어졌다. 엄마는 당시 갓 돌이 지난 막내 동생과 함께 "아픈 몸이 나으면 꼭 돌아온다"는 말만 남긴 채 고향인 방콕으로 떠났다.
엄마가 떠나버린 지 벌써 5년째, 은지와 성진이는 훌쩍 커 버렸지만 간간이 엄마가 보내오는 전화와 편지를 통해 엄마와 만날 뿐이다. 그래서 남매에겐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해가 갈수록 쌓여만 가고 있었다. 아빠(44)와 할머니(66)는 지난 4년 남매에게 엄마의 빈 자리가 너무나 컸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언제 오려나, 하루가 멀다하고 동구 밖에서 며느리를 기다렸는데…요즘은 며느리가 너무 밉고, 화가 나."은지는 약간은 검은 피부에 초롱한 눈을 가진, 예쁘게 생긴 아이다. 동생은 엄마보다는 아빠를 닮았고, 피부도 뽀얗다. 하지만 은지는 또래들보다 키가 많이 작아 보였다. 성진이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엄마가 없는데 어떻게 애들이 제대로 컸겠어. 아이들 얼굴만 보면 속병이 도져. 성진이는 네살이 됐어도 우리 말을 잘 못했고, 잘 걷지도 못해 기어다녔어. 남매 둘이 서로 손을 꼭 잡고 자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워."할머니와 아빠는 엄마의 빈 자리를 채워야 했었다.
"10년 전 결혼 후 줄곧 아들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다시피 했어.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어."부부는 1996년 종교단체의 소개로 결혼했다. 곧 바로 황새마을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부인은 한국생활, 특히 농촌 오지마을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혼해 떠나기 전 5년간 봉화읍 내로 살림을 두 번이나 나갔어. 결국은 읍내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해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왔지. 한국에서 5년을 살았지만 우리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
한 살 터울로 남매를 낳았지만 남매 우유 먹이는 것도, 기저귀 빨래도 모두 할머니와 아빠의 몫이었다고 했다."며느리가 힘들어 할까봐 농사일도 시키지 않았어. 들에 새참도 내가 직접 날랐어."부인은 이웃들과도 잘 사귀지 못했고, 틈만 나면 집에 있질 않았다고 했다. 겨울 날씨가 매서운 봉화는 특히 아이들의 옷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열대 지방에서 온 며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는 것.
"며느리는 늘 혼자였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울증이 심한 것 같았어. 태국에 간 것도 우울증 치료를 하러 간거지. 다른 마을 며느리들은 다 잘 적응해 사는데 왜 우리 며느리만 떠나갔는지 모르겠어."
은지는 유치원 졸업과 초등학교 입학을 엄마가 아닌 아빠와 함께 했다. 지난 17일 성진이의 유치원 졸업식에도 엄마가 아닌 아빠가 곁을 지켰다."성진이하고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고, 학교에도 친구들이 많아요. 엄마가 오면 꼭 자랑할 거예요." 은지는 기자에게 엄마가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주나 봉화 장에서 외국 며느리들을 볼 때면 며느리 생각이 간절해. 미우나 고우나 내 며느리야. 자리만 지키고 아이들 보살펴 주기만 해도 돼. 은지 엄마, 꼭 돌아와." 은지네 가족은 따뜻한 봄날 며느리가 꼭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 코시안이란?=공식화한 용어는 아니지만 한국인 남자와 동남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말한다. 지난 10년 전 부터 농촌 노총각들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 여성들과의 국제결혼이 봇물을 이루면서 2세들도 급증하는 추세다. 농촌 마을 어디에서나 2세들을 쉽잖게 볼 수 있다. 기획탐사팀 이종규·이상준기자 봉화·마경대 기자
사진:은지와 성진이가 마루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남매는 따뜻한 봄날엔 엄마가 꼭 올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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