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침해 논란을 빚어온 청송보호감호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정부와 여당이 최근 보호감호제를 규정한 사회보호법을 올 상반기 중 폐지키로 합의한 데 따른 것. 보호감호소는 앞으로 범죄를 저지른 약물중독자 등을 치료하는 치료보호소로 사용될 예정이다.군사정권시절인 1981년 만들어진 보호감호소는 그동안 이중처벌 등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폐쇄성으로 인해 그 내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25년 동안 수감자들의 애환과 함께 묻히게 될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떻게 생겨났나
형기를 마친 강도·폭력·절도 등 상습범들을 사회와 격리시키기 위해 군사정권이 만든 보호감호소의 모태는 1980년 탄생한 사회보호법과 보호감호제도.
삼청교육대의 합법화를 위해 제정된 이 법은 대표적인 악법으로 손꼽힌다. 때문에 시민사회단체들이 보호감호제도의 위헌성을 문제삼아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대법원은 1989년 감호제도 자체에 대한 합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최초 보호감호소의 위치도 청송이 아니었다. 서해 안마도가 유력하게 검토됐다가 식수 및 보안 등의 이유로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일대로 변경됐다는 것.
최초의 보호감호대상자들은 물론 삼청교육생들. 신군부는 1981년 12월 교육생 2천400명을 청송 제1, 2 감호소에 최초로 수용시켰다. 감호자들은 청송 감호소가 완공되기 이전 1년은 군부대에 수용됐고 인간적인 처우와 함께 정식 재판을 요구하기도 했다.
◇인권 유린 시비
철저히 격리된 청송감호소에서 인권유린 실상은 처참했다고 출소자들은 입을 모은다. 감호소는 시설에서부터 관리까지 교도소와 똑같고 처우 역시 교도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는 것.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1년 12월3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감호소에서 첫 현장조사를 벌였지만 감호소가 첫 공개된 것은 개설 17년 만인 1998년 9월24일. 법무부는 천주교 인권위원회·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 등 10개 인권단체 대표와 취재진을 초청, 교도소 및 감호소 시설을 둘러보도록 했다.당시 취재진으로 참가했던 한 언론관계자는 "교도소 내 인권유린의 공간으로 지적받아온 '징벌 방'의 존재를 놓고 시민단체들과 교도소 측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감호소가 또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 때문이었다. 이두용 감독, 양택조·조형기·중광 스님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1990년 5월 재경 청송향우회에 의해 상영이 중단됐다.
향우회 한 관계자는 "동양 최대 규모의 교도소가 있는 곳이라는 소문 때문에 서울에선 청송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며 "산자수명하고 인심 좋은 고향이 나쁘게 비칠까봐 상영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고 회고했다. 이후 감호소 개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거물급 재소자는 누가 있었나
청송감호소는 그 명성만큼이나 수용자들 가운데 '유명인사'가 많았다. 1970년대 국내 최대 조직폭력단체였던 '서방파' 두목 김태촌(57)씨는 1990년 '범죄와의 전쟁' 때 범죄조직결성 혐의로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고 이곳에 수감됐다. 김씨는 2002년 보호감호 처분은 부당하다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부유층과 권력층만을 대상으로 절도행각을 벌여 화제가 됐던 조세형은 징역 15년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1998년 출소한 뒤 종교에 귀의해 활발하게 활동했던 그는 2000년 일본 방문 중 주택가를 돌며 금품을 훔치다 또다시 체포돼 3년6개월 간 일본 형무소에서 보냈다.장기 도주극을 벌였던 신창원도 청송 제2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신씨는 지난해 고입 검정고시 및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기도 했다.
청송·김경돈기자 kdon@imaeil.com
사진:청송 감호소 정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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