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그야말로 운수대통이다. 설마라고 생각했던 유럽 배낭여행 이벤트에 턱 하니 뽑혔으니 말이다. 유럽 배낭여행의 기회가 생기자, 다른 모든 것은 일단 제쳐두었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짬짬이 하던 공부도 미뤄 놓았다.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이 좋은 기회에 혼자 떠나기가 왠지 아까워 중학생 딸을 데려가기로 했다. 물론 추가 비용이 만만찮겠지만 편하게 1년치 학원비를 미리 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행히 봄방학도 끼어있어 딸에겐 학교 수업에 큰 지장도 없다. 열흘 정도의 수업보다 유럽을 보고 느끼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떠나기 하루 전날인 15일, 유로패스와 호텔 티켓을 다 받고 나니 정말 떠난다는 느낌이 북받쳐 올랐다. 16일 인천공항 출국장에 나서면서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간다, 유럽으로. 고 나우(Go Now)!
12시간의 기다림과 설렘 끝에 도착한 곳은 런던 히드로 공항. 전반적으로 낡은 느낌이 들고 곳곳에 내부수리 중이라는 푯말이 눈에 띈다.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모든 수속 절차를 원스톱으로 끝냈다. 영어로 대화하는 게 사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냐면 sightseeing(관광), Four days(4일 있겠다) 등의 간단한 영어 단어만으로 거의 모든 게 해결되니까. 실생활에서도 안 해보면 막연히 두렵지만 막상 하고 나면 별거 아닌 게 얼마나 많은가.
런던의 지하철을 타는 것도 생각보다 쉬웠다. 잘 모르겠다 싶으면 곳곳에 서 있는 안내원이나 현지인에게 "Excuse me"하면서 가고 싶은 역 이름만 말하면 그만이다.
이번에 내가 정한 유럽여행 테마는 유럽시장 둘러보기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그곳 사람들의 삶이 가장 잘 묻어나고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로서는 주부의 생리를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 식사 후 호텔 주위를 산책하듯 가볍게 둘러보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한 작은 시장을 발견했다. 우리나라는 오후에 시장이 들어서는 게 보통인데 여기서는 아침부터 장이 펼쳐졌다. 대부분 길거리의 조그만 과일가게에 불과하지만 상품 진열 솜씨는 우리나라 백화점 뺨쳤다. 아무래도 여기 과일이나 야채가 색깔이 화려해서 그런 듯하다. 망고'아보카도'라임 등 생소한 열대 과일이 보이는가 하면 마늘'파'감자'고구마 등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못생긴 야채도 색색이 담아두니 사뭇 먹음직스럽다.
과일이나 야채마다 가격표를 다 붙여둔 모습이 우리나라 일반 노점과는 다르다. 아침 일찍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장보러 나온 새댁, 커다란 바구니를 커리어에 담고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는 할머니 등. 그들은 세대의 구분 없이 좁은 골목길에 뒤섞여 과일을 요리조리 고르고 있었다. 과일은 대부분 스페인에서 들어오는 것이라고 이곳 상인들은 전한다. 햇볕이 부족한 영국 날씨 탓에 맛있는 과일은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반찬거리로 콩나물과 두부를 손쉽게 사듯 이곳 사람들은 감자와 브로콜리를 많이 사간다. 우리나라 슈퍼에서 무척 비싸게 팔리는 아스파라거스가 눈에 띄자, 나는 괜히 들었다 놓았다 해본다. 가게 주인은 대부분 현지인이 아닌 아랍계 외국인들 같다. 미국이 최근 들어 외국 이민자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모두 영국으로 몰린다는 소문이 들리는데 실제로 그런 것 같다. 손님들도 현지인들보다 외국인이 많다.
우리의 첫 일정은 옥스퍼드시를 가보는 것. 런던에서 옥스퍼드까지 버스로 1시간 40분 정도 걸리는 짧지 않은 시간인데도 창밖의 화려한 영국 전원 구경을 하다 보니 벌써 도착이다. 날씨도 아주 맑아 끝없이 펼쳐지는 녹색 잔디가 더 싱그러워보였다.
유럽에 오기 전, 영국에서 살다 온 친구에게 "겨울에 영국에 여행을 가면 좀 썰렁하진 않을까"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 왈, "아니야. 거긴 잔디가 늘 녹색이야".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겨울이란 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녹색이 수놓고 있다. 온통 새파란 나무들이 주위를 덮어 마치 봄이란 착각마저 들 정도다.
첫 행선지는 옥스퍼드에 위치한 'Coverd Market'이란 재래시장. 이름 대로 시장 골목마다 다 지붕으로 덮여 있다. 생김새나 구조가 대구의 교동시장과 엇비슷하다. 좁은 골목은 계속 이어지고 닭'오리'칠면조 등 고기류로 유명하다는 명성답게 정육점이 쭉 늘어서 있다. 난 입이 짧아 오리 고기도 못 먹는데 이곳엔 별 희한한 고기들이 다 전시되어 있다. 양고기'칠면조 등. 헉! 토끼 가죽만 상자에 담겨 있는데 그러면 토끼고기를 먹는다는 건가. 마치 순대같이 생긴 소시지도 보인다. 정육점마다 여자 판매원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힘좋게 보이는 남자들이 점령하고 있다. 사진을 계속 찍어도 그저 씩하고 웃기만 한다.
이곳 시장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꽃집이다. 정원을 가꾸고 창문이나 베란다 꾸미기를 즐기는 사람들답게 꽃을 사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버스 창가로 보이는 대부분의 주택은 창문마다 예쁜 화분 하나씩은 꼭 놓아두었다. 배추 사고 파 사고 감자 한 꾸러미 산 다음, 꽃 한 다발도 함께 사는 그네들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옆에 따라다니던 딸이 뭘 좀 먹자고 졸랐다. 시장에 들렀으니 좌판에 앉아 수제비나 칼국수 한 그릇 먹으면 딱 좋겠지만 여긴 엄연히 영국이다. 샌드위치 가게 진열대에서 먹음직한 햄버거를 집었더니 2개에 5파운드(1만 원 상당)란다. 헉! 햄버거도 이렇게 비싼데 뭘 하나 사먹을 수 있을까.
영국은 지갑이 두둑해야 여행이 즐겁다고 한 게 실감이 났다. 옥스퍼드에서 시장을 구경하고 런던으로 돌아오면서 내 가방에는 반찬거리가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고풍스런 영국 근교 도시의 아담한 풍경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글·사진 도현주(주부·논술 강사)
사진: 호텔 인근에 자리한 조그마한 시장 모습. 노점답지 않게 진열에 꽤나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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