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학사상의 페미니즘은…

지금, 여기의 유학/김성기 외 지음/성균관대 출판부 펴냄

흔히 유학(儒學)이라 하면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서삼경을 외는 서당의 모습도 빠질 수가 없다. 하지만, 요즈음 유학은 그다지 유쾌한 이미지로만 비치지 않는다. 사회'경제적으로 위기론이 닥칠 때마다 유학은 여론의 심판대에 오르기 일쑤다.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구시대적 유물이라느니, 성차별적 폐단의 주범이라느니 등….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사회질서 유지의 근간이자 구성원들의 정신과 일상을 지배했던 유학이 이제는 폐기처분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일까? 11명의 동양철학'동양사상 연구자들이 쓴 '지금, 여기의 유학'은 무관심의 사각지대로 밀려난 유학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진단한 책이다.

'지금 우리에게 유학은 없다. 유학은 박물관 진열대에, 저기 성균관 담 넘어 호주제 폐지 반대를 외치는 유림들 속에, 역사책 한 귀퉁이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서구의 근대가 가져다준 기술문명과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와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판소리보다 팝송이 친근하며, 주희보다 칸트라는 이름에 보다 익숙하다. 바로 전세기, 500여 년 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유학사상과 유교문화는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저자들의 넋두리처럼 현대는 유학이 홀대받는 사회이다. 특히 최근 호주제 폐지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유학자들은 가부장주의자로 폄훼되기까지 한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정도로 유학의 얼굴에는 반사회적, 반진보적이라는 화장품이 칠해졌을 정도다.

우리에게 유교는 분명 긍정과 부정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 경제발전의 동인인 동시에 경제위기의 주범이고, 권위주의라는 비민주적 봉건윤리인 동시에 민권'정의 등 현대 민주주의와 양립 가능한 정치학이며, 여성을 억압하는 질곡인 동시에 양성 동반자적 윤리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책에서는 유학은 여전히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말한다. 지갑을 열면 바로 퇴계'율곡 등 유학자들의 얼굴이 반갑게 맞이한다. 또 돌, 결혼, 회갑, 장례, 제사 등 일생 동안 겪는 통과의례는 모두 유교적 관습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 민족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한글조차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창제한 것이다.

저자들은 오히려 유학은 앞으로 더욱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사상이라고 강조한다. 최근 전세계에서 불고 있는 탈근대 사회의 모델이 다름 아닌 유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전통사상과 문화라는 것. 또 서양의 학계에서 동양사상(특히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사회과학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전개되고 있음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란다. "유학의 태생적 본질을 이해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다면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서구 자본주의를 보완할 이론적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이 책을 쓴 저자들이 이 시대에 '아직도 유학을 탐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학을 다룬 책이라고 해서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도 좋다. 유교와 민주주의는 절충할 수 없을까, 여성 비하 사상으로만 일축되어 온 유교사상에도 페미니즘은 있을까, 서양의 지식인들은 유학을 어떻게 봤을까 등 우리가 궁금해 할 만한 의문들을 재미있게 서술해 쉽게 읽히도록 했다. 290쪽, 1만4천 원.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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