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열사 자손 중에 많이 배우고 넉넉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선친이 독립유공자인 채병목(80·대구시 동구 미대동)씨. 15년 전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고향인 미대동 여봉산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서울로 끌려가 손가락 힘줄이 모두 터지는 고문을 당하고 9개월간 징역살이를 했다. 그의 형은 16세 무렵 일본에 강제 징용된 뒤 생사불명이다. 아버지가 '왜놈 학교'라며 학교 문턱에도 못 가게 해 '무학(無學)자'로 남았다는 채씨는 고향에서 평생 소작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왔다.
그는 4년 전 자식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기초생활수급권자 신세가 됐다. 애국지사 유족보다 낮은 등급의 '표창 유족'인 그는 연금 29만원8천 원과 보훈청 생활조정수당, 구청 생활보조금을 합해 50만 원 남짓이 수입의 전부다. 채씨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며 "다만 내가 못 배우고 없는 탓에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 같다"고 넋두리했다.
대구 보훈청에 따르면 지역의 독립유공자 및 유가족 404명 중 연금 대상자가 아니거나 기초생활수급권자가 51명에 이른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족조차 돌보지 못해 상당수 후손들은 정부 보조금에 의존해 힘겹게 살고 있다.
송영순(가명·73·여)씨는 3년 전 독립유공자인 남편을 병으로 떠나 보내고 중구 북성로의 친척 집에서 힘든 노년을 보내고 있다. 남편 최씨는 고향인 완도에서 야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일본에 협력하라'는 강요를 피해 만주로 피신, 해방 후에야 고국 땅을 밟았다. 남편 사망 후 구청 생활보조금이 80여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깎였다는 송씨는 "지난 1월부터 보훈청에서 8만 원이 더 나와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김길조(65·달서구 성당동)씨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가 때로 원망스러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보성전문 출신인 부친 김재열씨는 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아버지는 항일운동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정작 아들은 기성회비를 못내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했고 가족들은 쌀을 꾸어다 살았다.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김명환 사무국장은 "친일파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땅을 염치도 없이 돌려받으려고 하는데 독립유공자 유가족들은 하루하루 밥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사진:아버지의 반대로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채 평생을 소작으로 어렵게 살아온 채병목씨가 선친의 영정을 어루만지며 "못 배우고 없는 탓에 자식들이 고생한다"며 넋두리하고 있다. 이채근기자minch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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