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사극에로 어디 갔나?
8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은장도와 마님의 에로티시즘'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토지' 때문이다. 박경리씨의 '토지'가 에로물과 무슨 연관이 있냐고? '토지'는 생활 속의 사극이다. 궁궐 안의 권력암투를 그린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물레방아, '씨 도둑', 마님 등 민초들의 욕망과 정조, 수절 등 사극에로물의 키워드가 빼곡한 작품이다. 형장의 이슬로 간 귀녀의 슬픈 야망은 그 극점일 것이다.
그리고 '토지' 하면 80년대가 떠올려진다. 바로 87년부터 KBS에서 방영된 2대 '토지' 때문이다. 최수지씨가 서희역을 맡았던 작품. 곱고 차가운, 그래서 더욱 범접하기 어려운 서희역에 참 잘 어울렸던 '토지'였다.
이때가 어떤 때냐? '변강쇠'(86년) '감자'(87년)를 비롯해 '고금소총'(88년) '가루지기'(88년) '떡'(88년) 등이 개봉된 때다. '어우동', '뽕' 등 희대의 걸작을 거쳐 고전 사극에로물이 절정이던 때다.
한국의 사극에로물은 미국으로 치면 잊혀진 웨스턴(서부영화)같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그리고 그들의 정서가 담겨있는 장르다. 수탈과 억압의 땅. 황량한 들판을 배경으로 홀연히 나타난 우리의 마당쇠. 그는 별 모양의 쉐리프(Sheriff 보안관) 배지는 없지만 민초의 영웅이다.
혹자는 마님의 뽀얀 속살만 탐하는 '종마'로 비하하지만, 그는 조선시대 계급사회를 통렬히 비판한 행동가다. "이 눔의 세상, 확 뒤집어져라"는 '저주'만 내뱉는 민초와 달리 그는 액션으로 보여준다.
나뭇짐을 져 나르거나, 역동적인 도끼질로 에너지를 분출한다. 간혹 소변으로 폭포를 만들거나, 방사의 힘으로 땅이 흔들려 일부 해변 마을에 쓰나미를 동반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장법이 일부에서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과장 없는 신화가 어디 있으랴.
거기다 그는 '벙어리 삼룡이'처럼 로맨티스트이자, 희생의 선구자가 아닌가. 마님 또한 은장도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마당쇠에게 몸을 허하며 권력 해방의 오르가슴을 사정없이 분사한다.
서부영화의 쉐인('쉐인')이나 윌 케인('하이눈'), 와이어트 어프('OK목장의 결투')처럼 그럴듯한 이름조차 없지만, 마당쇠는 민중에게 짜릿한 해방감을 선사하는 영웅이었다. 웨스턴은 간혹 연못가에서 남녀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교교히 흐르는 달빛 속에서 그들은 키스를 나누며 잠시나마 열정적인 시간을 보낸다.
한국의 사극 에로물은 더욱 활력이 넘친다. '산딸기',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등 영화처럼 폭포가 배경이다. 뇌쇄적인 반신욕 포즈. 웨스턴은 여인이 완전 나신으로 수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에서 완전 나신이 있을 수 있는가. 비록 물에 속살이 여지없이 드러나지만, 그 여인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가슴의 중간은 어김없이 굵은 치맛끈으로 동여 매 중요부분을 교묘하게 감춘다. 검열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까. 이 부분은 아직 미스터리. 제작자만 알뿐이다.
또 절구질은 왜 그리 힘찰까. 영원한 밀회 장소, 물방앗간. 얌전히 돌아가는 방아는 욕정이 절정에 이를 쯤 더욱 활력을 띤다.
한국의 사극 에로물이 웨스턴과 닮은 결정적인 점은 이제 은막 뒤로 사라졌다는 점이다. 웨스턴의 상투적인 결말이 젊은 관객의 기호를 자극하지 못하듯, 고전 에로물도 더 이상 젊은 관객의 성감대를 자극하지 못하고 있다.
널리고 널린 현대적인 무드의 밀회 공간, 명품으로 치장된 세련된 여인네의 모던 스타일, 과장이 허용되지 않는 정서의 빡빡함, 기다림 없이 곧장 알몸이 되고 마는 패스트푸드같은 욕정…그 속에서 고전 에로물은 더욱 짙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에로영화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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