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학맥(學脈)'이 서울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굳이 '영남학파'라고 이름 불러도 좋다.
학계 거목으로 불리는 원로 학자들 중에서 예술원, 학술원, 한림원 종신회원으로 우리 문화와 학문발전의 근간을 이룬 학자들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서양사학계의 거목인 노명식(盧明植) 전 한림대 교수(82)가 있다.
한국서양학계 1세대인 노 전 교수는 평북 의주 출신이지만 대구가 제2의 고향이고, 처가도 청송에 있다.
6·25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와 17년 동안 경북대와 계명대에서 서양사를 가르쳤던 것이다.
김엽 세명대 전 총장과 오주환 경북대 명예교수, 허진영 영남대 명예교수 등이 제자다.
노 전 교수는 경북대 문리대학장을 역임한 뒤 1968년 대구를 떠나 경희대·성균관대·한림대 교수와 국사편찬위원을 거치며 한국 서양사학의 근간을 세웠다.
노 전 교수는 "해방 이후 근대국가 성립이 우리 민족의 지상목표였을 때 서양사 속에서 모델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회고했다.
조동걸(趙東杰) 국민대 명예교수(73·영양)는 한국 독립운동사와 현대 사학사의 개척자로 꼽힌다.
경북대 역사교육과를 졸업(57년)했지만 강원도로 가 7년간 춘천여중과 강릉농고에서 교편을 잡다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
노명식 전 교수의 제자이기도 하다.
조 교수는 거시적 역사담론보다는 지방사(史)에 주목했고 한말 독립운동사 연구에 평생 동안 몰입했다.
그가 펴낸 20여 권의 저작물은 한결같이 농민·의병의 독립투쟁과 관련된 것들이다.
조 교수는 "1970년 당시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근대사에 몰입했고 6·25 세대들이 갖고 있는 고난의 체험이 배경이 됐다"고 말했다.
국문학계에는 조동일(趙東一·66·영양) 서울대 명예교수가 있다.
지난해 8월 정년퇴임한 조 교수는 지금까지 50권의 저서와 200편의 논문을 쏟아냈고, 그가 쓴 한국문학통사(전6권)는 국문학도들의 '교과서'로 통한다.
계명대(68~77년) 와 영남대(77~81년) 교수로 10년 넘게 대구에서 살았던 조 교수는 " 경북 북부지방의 구비문학을 탐구해 문학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대구에 있을 때 가르쳤던 제자로는 오양호(인천대)·이기철(영남대)·강은해(계명대)·김효중(대구가톨릭대)·김영숙(대구한의대)·임재해·천혜숙(안동대)·여세주(경주대)·권태을(상주대) 교수 등이 있다.
조 교수는 지난해 정년퇴임한 뒤 첫 직장이었던 계명대(석좌교수)로 다시 돌아왔다.
"과거 계명대 시절은 왕성한 의욕을 갖고 무엇이든 해보려고 나섰던 (학문의)출발기"라는 점에서 이번 계명대 행(行)은 남은 인생에 또 다른 시작인 셈이다.
한국 지성사의 큰 획을 그은 백낙청(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67·대구)와 김병익(金炳翼) 인하대 초빙교수(67·상주)도 빼놓을 수 없다.
본가가 평북 정주지만, 외가인 대구 봉덕동에서 태어난 백 교수는 19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으로 참여, 리얼리즘 문학의 심화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는 비판적 지식인을 양산하는 산파역할을 했다.
반면, 김 교수는 1970년 '문학과 지성'의 편집동인으로 참여, 서구 사상과 문예이론을 소개·접목시켜 예술의 격을 높이는 본격 문학평론지 시대를 열었다.
70, 80년대 '창비'와 '문지'의 경쟁은 한국 지식인과 문학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외국문학계에선 학술원 회원이자 원로 영문학자인 여석기(呂石基) 고려대 명예교수(83·김천)와 불문학자인 김화영(金華榮) 고려대 명예교수(64·영주)가 있다.
경북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79년)를 받은 여 교수는 고대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60, 70년대 한국 영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데 공을 세웠고 영미희곡 전공자답게 연극비평에도 앞장섰다.
여 교수는 "고교시절(김천고) 도서관에서 모스크바 예술극장에 관한 영어책을 발견해 아주 흥미 있게 읽고 그 일부를 일어로 번역해 교지에 싣기도 했었다"고 기억했다.
김 교수도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개성적인 글쓰기와 번역, 치열한 평론 활동으로 문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헌법학계의 3대 거목으로 불리는 김철수(金哲洙) 서울대 명예교수(72)는 대구 출신이다.
학술원 회원이자 세계헌법학회 한국지부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김 교수는 56년 경북고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법대 교수로 지난 98년까지 재직한 뒤 정년퇴임했다.
그가 쓴 '헌법학개론'은 수십 년간 고시생의 수험서였다.
김 교수는 평생 학자의 길만 걸었으나,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내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수적 시각에서 신념을 털어내 진보진영으로부터 "학문 권력을 휘두른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경제학계에서는 정통 '서강학파' 1세대로 불리는 서강대 김병주(金秉柱) 명예교수(66·상주)가 있다.
상주 함창중을 나왔으나 산림청 공무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던 바람에"경북고를 나와야 했는데, 어찌해서 서울 경복고를 나온" 김 교수는, 지난해 2월 정년퇴임 전까지 37년간 국내 경제학계의 '어른'으로 활동했다.
같은 서강학파 1세대였던 남덕우 전 총리와 김만제·이승윤 전 경제부총리는 모두 학교를 떠나 관계로 진출했으나 김 교수는 대학에 남아 서강학파의 이론적 뿌리를 내리게 했다.
그는 한국경제학회장과 금융산업발전심의 위원장 등 굵직한 이력을 뒤로 하고라도, 5공 시절부터 정부 경제정책의 '매운 소금' 역할을 다했다.
김 교수는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비판적 중립자의 길을 갔다고 자부한다"며 "기회가 닿으면 대구에 내려가 후학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교육·심리학계에는 김재은(金在恩) 이화여대 명예교수(74)와 이장호(李將鎬) 서울대 명예교수(69)가 있다.
두 사람은 교육학계 1, 2세대인 김종서·정범모·정원식(서울대)·김란수(연세대) 교수와 함께 우리 인문학에 교육·심리학을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 교수가 발달심리 쪽이 전공이라면, 이 교수는 상담심리의 이론적 뼈대를 세웠다.
김 교수는 안동이 고향으로 안동사범(1950년·현 안동대)을 졸업한 뒤 상경, 이화여대에서 정년을 마쳤다.
아동·청소년의 발달과 가족 해체에 따른 병리현상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청소년문화개발원 이사장, 한국가족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장호 교수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나 유년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6·25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와 경북고(54년 졸업)를 졸업했다.
이종구 전 국방장관, 박원탁 전 의원(11대)이 고교 동기다.
기와집이던 대구 신암동 교사(校舍)와 중앙통에서 신문 팔던 기억이 아련하다고 했다.
아들(이창환·부산대 교수)도 심리학을 전공했고, 며느리 역시 이 교수가 다녔던 대학원(미 텍사스대)에 재학 중이다.
이 교수는 "대구에 가까운 친·인척은 없지만 '팔공회'(경북고-서울대 동기모임) 모임에 참석하는 등 대구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미스터 무궁화 위성'으로 불리는 황보한(皇甫漢) 전 인하대 초빙교수(67)는 대구 출신이다.
지난 90년 KT의 위성운용 단장으로 있으며 한국 최초의 상업용 위성인 무궁화 위성 1~3호 발사를 주도한 우주 항공분야의 독보적 과학자로 불린다.
2001년 8월 항공우주 분야의 '노벨상'으로 꼽히는 미국 항공우주학회(AIAA)의 '폰 브라운상'을 받은 황보 전 교수는 경북대 대학원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65년 영남대 화공과 교수로 재직하다 도미했었다.
의학계에서 명성을 쌓은 인사들도 많다.
학술원 회원이자 병리학 분야 권위자인 김용일(金勇一) 서울대 명예교수(70·상주·전 가천의대 총장), 1982년부터 네팔 의료봉사 활동을 펼쳐온 이근후(李根厚) 박사(70·대구), 유명 정신과 전문의인 이시형(李時炯) 박사(71·대구), 치주학 분야의 석학인 최상묵(崔翔默) 서울대 명예교수(67·청도) 등이 있다.
또한 도종웅(都鐘雄) 국립의료원장(62·대구), 대한임상약리학회 회장인 김경환(金景煥) 연세대 의대학장(59·경산), 한국정신신체학회 회장인 정도언(鄭道彦) 서울대 의대 교수(54·대구), 한국뇌신경과학회 이사장인 서유헌(徐維憲) 서울대 의대 교수(57·김천) 등도 있다.
김태완기자 kimchi@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