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늦둥이 아빠 배진덕의 얼렁뚱땅 살림이야기-말 배우는 아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주례를 서주셨던 고등학교 교장선생님께서 결혼식 날 우리 부부를 위해 선물로 주신 책입니다. 몇 년이 흐르도록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지만, 책의 제목처럼 전 화성인이고 아내는 금성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씩 해봅니다. 첫 아이를 낳을 때도, 둘째를 낳고 나서도 첫 대면을 할 때마다 아이들이 지구인이 아니라 마치 외계에서 온 ET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외계 언어 같았습니다. 뭐라고 자기 나름대로 사물을 지적하며 말이란 것을 했지만 이제까지 수십 년 지구에서 생활하며 지구인이 다 되어버린 저와 아내는 아이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옹알이거니 하며 말이 아닌 양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무척 답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큰놈이 먼저 지구 언어를 배우기로 작심한 모양입니다. 이제 지구에 온 지 2년이 넘은 큰놈은 지구보다 문명이 더욱 발달된 별에서 온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25개월 된 아이의 언어학습 능력이 경이로울 정도로 대단하니까요.

"일나(일어서)" "안자(앉아)" "들와(들어와)" "일거(읽어)" "됴타(좋다)" "불서(불을 켜)" "이 뭐야(이게 뭐야)"라는 말이 아이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얼마 전엔 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던 아이가 갑자기 제게 "울었다"라고 하더군요. "왜 울었냐"라고 묻자 "머리 꽝 했다"라고 그 조그만 입으로 답하는 게 저로선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빠의 물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답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아이가 사용하는 말의 상당수가 명령조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아이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입장이라는 걸 잘 알기에 명령형은 의식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는데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그저 그림책을 펴놓고 "나비는 훨훨 날아다닌다", "사자는 어흥 하고 운다"라는 정도만 가르쳤을 뿐인데요. 분명 아이는 저하고 입장이 달라 자기 필요에 의해 명령형을 먼저 배운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소주 한 잔 하러 나갔는데 휴대전화가 울리더군요. 바로 아들놈이었습니다. "누구냐"라고 묻자 "아빠" 하고 부르더니 "빠이 들와(빨리 들어와)"라고 하는 겁니다. 이 짧은 통화에도 저는 묘한 기분이 들어 아이의 요구대로 일찍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이내 아내가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들을 전술상 이용했다는 생각에 약간 불쾌해지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아이 역시 아빠가 술도 좀 줄이고 건강도 챙기기를 바라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섭생에 유념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더군요.

머지않아 아들과 저의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니 기쁘고 아들의 물음에 성심껏 답해주는 아빠가 되리라 다짐도 합니다. "아들아, 지구인으로 살아가더라도 아름답고 고운 말만 배워라. 별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을, 남을 속이고 험담하는 말은 빼고…."

변호사 jdb2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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