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이분법과 표현의 자유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조간신문을 집어 온다.

기사를 읽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인터넷을 통해 다른 조간신문의 보도 내용을 살펴본다.

그래도 그 진의를 알기 어려우면 이른 아침에 당장 여기저기 아는 기자나 공무원 친구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으니 일단 출근한 다음 이른바 '인터넷언론'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한 인터넷언론을 검색해 기사를 읽어 보면 이미 반대란 있을 수 없다는 확고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 쉽게 발견된다.

그런데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다른 인터넷언론에서는 똑같은 주제에 대하여 정반대의 결론을 더욱 단호한 어조로 이미 선포하고 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각 인터넷언론들이 확인한 사실관계가 확연히 다른 경우는 물론이고 서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관계마저 똑같은 경우에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더구나, 기사 말미에 일반 독자들이 붙인 꼬리글을 읽다 보면 우리나라가 지금 내전을 치르고 있는 나라가 아닌지 착각할 정도가 된다.

어떤 주제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다고 할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을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이자 이른바 전자민주주의의 구현으로 보아 나쁘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기자나 논객이 쓴 글 아래에 달린 무시무시한 꼬리글을 읽고서도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왜 우리는 이처럼 피아를 극단적으로 나누어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싸우고 있는 것인가?

보통의 국민으로서는 다급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에도 지쳐 있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당장 대통령 임기나 헌법재판소의 역할에 관한 헌법 개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국민 개개인으로서는 생계를 접어 두고서까지 흥분할 일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기자나 논객을 아버지를 죽인 원수처럼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건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우리 중의 누구이냐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의도하였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 간에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들이 알든 알지 못하든 이미 심각한 폐해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피아를 극단적으로 구분하고 나아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의 글이나 개인 홈페이지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는 상황이 낳은 가장 독소적인 결과는 아무도 이와 같이 얼굴도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협박과 모욕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자신의 사상과 의견을 자유로이 발표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말문이 막힌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국가가 나서서 일일이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구시대는 이미 멀리 갔다.

그러나 다시 익명(필명은 당장 알 수 있고 실명도 민·형사상 문제가 되면 알 길은 있지만)의 다수가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형성과 의사 표현을 사실상 금압하고 있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극단적 이분법의 희생양은 결국 국민이고 국가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역감정이라는 망국적 선입견을 아직도 차마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국민이며 우리 지역민들은 그 핵심적인 희생양이다.

반공 이념의 흑백논리, 지역감정의 구태와 현재의 극단적 이분법을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도 없다.

이제 새로운 길로 가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가 완성하여야 할 민주주의는 구성원 모두를 위한 최선을 찾으려는 독선이 빚어낼지도 모르는 비극을 회피하고 당장의 결과는 그만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안전한 차선'을 찾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강력한 리더십이 아니라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여야만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할 수 있고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헌법 전문(前文)이 이미 오래전부터 외치고 있는 진리이다.

자율과 조화, 타협과 양보를 통하여 나만 옳다는 억지가 아니라 너도 옳을 수 있다는 이해를 가져야 할 때다.

누군가 나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최선의 길이니 두 말 말고 따르라고 한다면 우린 분명 그를 따라 나서지 않아야 한다.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가자고 하는 그 길이 항상 잘못된 길이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선택한 차선의 길로 가는 안전한 승강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그 일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겸허히 듣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절차를 통해 발견한 차선이 곧 인간사회의 최선의 모습이다.

바로 민주주의다.강정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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