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지하철 정거장에서'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이 시는 미국은 전체가 정신병원이라며 조국을 공공연히 비난했던 이미지스트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지하철 정거장에서'라는 짧은 시이다.

그의 생애는 생전엔 현대시의 이단자로 그릇 평가되어 왔으나, 그가 타계한 후 오늘날까지 현대시에 끼친 그의 영향력과 후광은 날이 갈수록 더할 뿐이다. 단테의 '신곡'에 비견되는 '켄토스', 현대시의 기념비로 일컬어지는 '휴, 셀윈, 모빌리'와 '지하철 정거장에서'는 그의 대표적인 이미지즘의 시이다.

한 시인이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올바르게 평가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시인을 불행하게 한다. 특히 올바르게 평가되지 못하는 까닭이 문학과 관계없는 다른 상황(그는 미국을 버리고 이탈리아로 망명했다)들 때문이라면 그 시인은 영원한 고독의 표상인 것이다.

20세기 시단에 누구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으면서도 누구보다 불우한 일생을 보낸 에즈라 파운드의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유행을 민감하게 따르고 세상 돌아감에 눈치 빠른 한 때의 명성이 자자한 베스트 셀러를 조심스럽게 뒤로 밀쳐 둘 수 있었다.

1972년 11월1일 87세의 일기로 파운드가 타계했을 때 비로소 그의 업적은 새삼스럽게 긍정적인 면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20세기 문단에 끼친 그의 지도자적 역할도 그의 작품에 못지않게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테면 T S 엘리어트가 쓴 '황무지'의 원고를 색연필로 대담하게 뜯어고치는가 하면 제목까지 바꾸어 오늘날의 명시로 만든 사람이 파운드였으며 제임스 조이스, 어네스트 헤밍웨이, 로버트 프로스트 등도 파운드의 영향 아래에서 대가로 성장할 수 있었음도 그의 문단에 끼친 영향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파운드의 시가 떠오르곤 한다. 그러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중앙로를 통과하자 죽음의 냄새가 창가로 스며들었다. 국가와 삶이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돌아서서 자기 배를 두드린다는 생각에 이르자 우리가 미친 듯 고개를 흔드는 버릇은 다 연유가 있는 것이리라.

고희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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