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선거사무실의 아이비 기념일

성은애의 기가 막힌 번역서 중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더블린 사람들'이 있다. 작가가 살았던 당대의 더블린 시민들의 모습에서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아일랜드 사람들의 무기력과 갈망과 좌절을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식민지 특유의 피폐한 상황, 아일랜드적인 전통의 소멸, 정치적 열망의 좌절과 기회주의의 팽배, 하나의 습관으로 전락한 종교, 창조적 기질을 계발해주지 못하는 문화적 분위기 등은 '더블린 사람들'에 나타나는 삶의 조건들이다.

아마도 강대국의 희롱을 습관처럼 겪는 역사를 가진 우리로서도 무척이나 낯익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대중에게 배신당한 예술가, 혹은 스스로 부르주아적 질서를 거부하고 현실로부터 등 돌린 예술가인 제임스 조이스는 소설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 등 현대의 모든 예술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일반 독자들에겐 근접하기 어려운 현대 예술을 상징하는 하나의 거대한 이름이지만 '더블린 사람들'에서의 잔잔한 풍자는 오히려 조이스의 무게를 벗어나 우리의 이웃처럼 가깝게 해주는 인간미가 흐르고 있다. 도시가 가진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지는 아일랜드 민족의 낙천성과 선량함 그리고 그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헌신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단편집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선거 사무실의 아이비 기념일'은 아일랜드 민족당의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이 부관의 부인과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당수 자리에서 물러나 사망하고 민족당이 분열된 지 10년 후인 1902년 시의회 선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민족진영이 연대의 구심점을 상실한 상황에서 선거란 아무런 정치적 전망도, 진지하게 싸울만한 명분도 제고하지 못하는 한갓 도박일 뿐이다. 낙하산 공천을 받은 티어니는 자신의 이권을 노릴 뿐이며, 오코너를 비롯한 선거 운동원들도 썰렁한 날씨를 핑계삼아 자신들의 일당이나 챙겨주고 갈증을 풀 맥주나 사주길 기다리고 있는 풍경이 사뭇 시사적이다.

즉 이 단편을 통해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제가 될만한 병명을 찾으려 한다면 현대사회의 한 징후인 정치적 무기력증을 낳게 하는 '마비' 즉 '정신적 마비'일 것이다.

고희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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