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순이삼촌

"오백 위(귀신을 세는 단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현기영의 연작소설 '순이삼촌'(1978년)에서 도려낸 한 단면이다. 작가는 30년 동안 묻혀 있던 4'3사건의 진실을 최초로 소설로 공론화시켰다. 이 소설로 인해 보안사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책도 발매금지되는 고초를 겪었지만, 이 작품이 지닌 문학사적 역사적 의의는 그로 인해 더한층 분명해졌다.

'순이삼촌'은 1948년 음력 섣달 19일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 사건이 주제다. 할아버지 제사에 맞춰 고향인 제주 서촌 마을에 내려간 '나'를 화자로 내세운 '순이삼촌'은 30년 전 향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통해 4'3사건의 아픈 역사를 고발한다. 학살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시체더미에 가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삼촌(아지망)이지만 평생 그 사건으로 인한 환청을 떨쳐버리지 못하다가 끝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고 만다.

작가는 군인의 양민학살 현장을 아주 절실하게 묘사, 참혹상을 고발함과 동시에 학살의 와중에 극적으로 생존한 순이삼촌의 정신과 삶이 어떻게 황폐화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4'3의 여파가 지금까지 제주도민에게 어떠한 정신적 상처를 주고 있는지 살 에듯이 되짚고 있는 것이다.

"살아남은 가족끼리 서로 붙안고서 마을에서 들려오는 타죽는 소울음보다 더 질긴 울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운동장의 진창흙은 함부로 내달린 스리쿼터 바퀴자국으로 여기저기 패어 있고 벗겨진 만월표 고무신짝들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그 위로 불타는 마을의 불빛이 밀려와 땅거죽이 붉게 물들었다."

작가는 군인들이 떠난 뒤의 참혹한 전경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천형의 땅 제주섬을 돌아볼 육지 사람들이라면, 비행기가 착륙할 때 쯤이면 비행장 땅밑 지하에서도 죽은 혼령들이 까마득히 쌓여 있을 테니, 잠시라도 두발이 저절로 들어올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고희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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