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화제의 저자-포토에세이집 출간 정순재 신부

"어두워진 눈, 떨리는 손, 반풍수에 반백 머리, 까치밥처럼 반만 남은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었는데, 어찌 빈 배 하나만은 마음 속에서 조는 듯 진작 떠날 줄 모릅니다."

경북 의성, 칠곡, 태전, 고산, 용성 천주교회 주임신부를 지내다 은퇴한 후 제주도에서 글쓰기와 사진작품 만들기에 전념하고 있는 정순재(63) 신부가 포토 에세이집 '윤희야, 나랑 살래'를 가톨릭출판사에서 펴냈다. '바람처럼 돌아오는 사람이 그립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작은 보따리 속의 자유', '쓰러지는 갈대, 바람의 노래여' 등에 이은 다섯 번째 에세이집이다.

그는 제주도의 바닷가 외돌개로 산책을 나서며 왜 그리도 지난날의 사랑과 갈망, 실패와 미련, 그리고 과거의 죄과와 부끄러운 한 시절의 망념(忘念)들이 자꾸 꼬리를 물고 울근불근 되살아나는지 모르겠다고 되묻는다.

그리고는 아직도 사랑을 노래하며 주접을 떠는 멋은 사그라지지 않았나 보다라고 잔잔한 웃음을 짓는다. '행복에는 간간이 슬픔이란 간도 필요하다'고 세르반테스가 말했듯이 조금은 고뇌로 찌든 서글픔을 품고 꼭두각시 놀음판에 어우러져 풍류 춤바람에 날뛰고 싶은 것인가.

그는 밤이 되어 달이 뜨고 갈치와 한치잡이 배들의 집어등으로 불야성을 이룰 때면 두고 온 평앙기생 그리듯 마음이 괴괴하여 쓸쓸한 옥피리 벗 삼아 이런저런 글줄 읊으며 몸만 뒤척인다며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최근의 내면적 근황을 슬며시 드러내기도 한다.

정 신부는 허다한 일상사에 대한 느낌을 편안한 글로 옮기면서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사유의 늪으로 이끈다. 성경과 불경, 그리고 동서양의 고전과 철학자의 말을 두루 인용하며 글속에 담긴 메시지에 윤기를 더한다.

에세이집에는 한편 한편의 글마다 흑백사진 한 장씩이 담겨져 있다. 글의 주제를 오롯이 형상화해 주기도 하는 사진들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질박한 삶의 내음과 희로애락이 배어 있다. 앞서 출간한 '쓰러지는 갈대, 바람의 노래여'에서 '부채 대신 카메라를 들고 한평생 외줄 위에서 춤을 추는 신부'로 풍자된 일화도 알 만하다.

정 신부가 더러는 가슴에 한이 응어리진 사람과 인생의 질곡에 신음하는 사람,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서 'Logos'(말씀)의 거룩함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의 사진에는 그래서 삶의 형상과 신의 말씀이 담겨 있다.

그는 남편의 장례식 때 혼절까지 했던 과부의 남성편력을 목격하고는 "과부는 울면서도 곧잘 화장을 하더라"며 각박하고 왜곡된 세태에 대한 풍자의 끈도 늦추지 않는다. 세상에는 미움도 그리움도 에누리 없는 삶을 저울에 달아 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눅눅한 봇짐 못 다 풀고 허랑한 삶, 실속없는 세간들 확 뿌리치고 길을 떠나지 못한 채 때늦은 근심과 천근 같은 지난날에 대한 뉘우침으로 늘 악몽만 꾸는 것 같습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황금빛 귤밭인 것을, 저 개야 공산에 걸린 달을 짖은들 무엇하랴"며 제주도에서의 소박한 일상을 삶에 대한 깊은 관조로 변주해내고 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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