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복기를 통해 선악과 진실을 가려낸다. 승착과 패착을 찾아내고 승패를 떠나 그 상황의 최선의 수를 탐구한다. 묘수와 사이비 묘수를 가려내고 잘못 지목된 억울한 실수의 누명도 벗겨준다. 그 과정은 실로 치열하다.
스타일과 관점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주장과 주장이 맞서고 질타와 냉소가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기도 한다. 바둑은 계가(計家)라는 행위로써 게임이 종료된다.
60년대 초의 일이다. 전도유망했던 한 신예기사와 소위 한물간 50대 후반의 노기사와의 대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종반에 접어들자 신예기사는 한 집 정도의 패배를 감지한다. 순간 상대의 바둑알 한 개를 슬쩍 감춘다. 억하심정의 자존심 때문이다.
이런 기사회생에 믿기지 않은 노기사는 복기를 통해 이의를 제기한다. 이때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해 숨긴 바둑알을 그만 꺼내놓고 만다. 술수의 승리보다 성찰적 부끄러움을 앞세운 예(禮)와 존경을 단호히 선택한 것이다. 양심고백으로 전도유망했던 한 신예기사는 프로바둑계에서 영구히 제명된 것은 물론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물론 이 사건도 이미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문제는 요즘의 사회일각의 지도층 인사들마저 밥 먹듯 하는 거짓말과 술수가 극에 달한다는 점이다. 갖은 비리로 가득 찬 이 사회가 후손인들 제대로 길러낼 리 있겠는가. 교사가 제자의 답안을 대신 써주는 편법이 당당히 고개를 들이밀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제자의 대학입학을 위해서라는 명분 뒤에 숨어 성적을 부풀리는 교사와 이를 맞장구치는 학부모, 그 밑에서 큰 아이들이 자라서 또 뭐가 될까. 게다가 우리 사회의 한쪽에서는 비정규직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에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한다는 노조가 개입해 뒷돈을 챙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이제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심해야할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귀족으로서의 온갖 특권을 누리며 페테르부르크의 상류사회에서 방탕과 나태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지천명의 세월에 이르러서 자신의 이러한 생활을 깊이 뉘우치고 참회를 통한 검소하고 성실한 삶으로 급선회했다.
어쨌든 톨스토이가 더욱 훌륭한 것은 뛰어난 문학작품을 많이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기 자신의 잘못된 삶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회개의 삶으로 거듭났다는 인간적 성찰에 있을 것이다. 또 "문체(文體)가 인간(人間)이다"라고 월터 페이트가 말한 것도 이와 결코 무관치 않는 해석이리라. 교양을 안 갖춘 정보달인은 세상을 황폐화한다.
요즈음 시대 상황은 말과 글이 너무 가볍다고 한다. 책임지지 못할 말과 글을 책임 있는 사람들이 마구 쏟아내는 사회가 어떤 해악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는 물어보나마나다.
옛말에 '입과 혀는 화와 근심의 근본이며, 몸을 망치는 도끼와 같다(口舌者는 禍患之門이요, 滅身之斧也라)'고 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내용이다. 말은 신중해야 한다는 경구다.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라는 어느 글에서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자기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부끄럽게 느끼는 사람이 많은 사회일수록 더 정의로운 사회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 집단이나 개인은 더 정의를 지향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
참으로 정의로운 사회는 자기중심적 정의가 아니라 성찰적 부끄러움이 넘치는 사회를 일컫는다. 이제 사회나 문학판도 복기를 진지하게 한번 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김종윤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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