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 없는 가격, 안락한 분위기로 7080세대의 발길을 끄는 유일한 약속 장소였던 '다방'에 사람이 없다. 식당에서 3천 원짜리 식사를 해도 커피, 녹차가 딸려 나오고 휴대전화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져 '만남 장소'로서의 역할도 퇴색됐다. 커피숍, 카페, 레스토랑이라는 다소 격조가 높아진 사교장에 밀려 '추억의 장소'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한낮의 다방 풍경
25일 오후 1시쯤 대구 서구청 앞 ㄷ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서 오세요"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실내는 손님 한 명 없이 을씨년스러웠고 테이블 위에는 플라스틱 재떨이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원래 손님이 이렇게 없어요?"라고 묻자 "원래는 많았지요. 지금은 다방을 접을까 고민 중이지만요."라는 힘없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70년대 다방 그 모습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연탄난로 위의 물주전자, 출처불명의 풍경그림 액자, 자그마한 텔레비전, 열면 '땡'하는 소리가 나는 금고, 때묻은 채 방치된 선풍기와 동전을 넣어야 걸 수 있는 빨간 공중전화기에 매직으로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주인 고옥수(52·여·서구 평리동)씨는 "서구에서는 여기가 제일로 손님이 많았지. 불과 8, 9년 전만 해도 법원, 경찰서, 관공서에 볼일 보러 온 사람들이 아침부터 찾아와 커피를 시키고 사람을 기다렸어. 배달 아가씨도 몇 명 있었는데 3년 전부터는 타산이 맞지 않아 모두 내보냈어. 손님이 많게는 하루 수백 명씩 다녀가곤 했는데…. 이젠 사양업 아니유"라며 한숨지었다.
손님이 줄어 전축을 팔았고 수입이 없어 새 벽지를 바르지도 못하고 있는 이 다방은 10년 전만 해도 하루에 50만~60만 원은 거뜬히 벌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변두리 다방은 하루에 하나꼴로 사라지고 있다고 고씨는 전했다.
◇만남장소는 옛날 얘기
휴게실업중앙회 대구지회 중부담당 김석진씨는 다방업의 쇠퇴는 휴대전화 때문이라고 했다.
김씨는 "약 10~20년 전에는 마땅히 갈 곳 없고 호주머니 사정도 뻔한 친구들이 만나거나 조용한 곳에서 볼일이 있는 사람들은 한 잔에 불과 몇 백 원하는 커피를 마시러 다방에 올 필요가 있었지요. 하지만 요즘 휴대전화의 대중화로 만남장소는 중요하지 않아졌습니다.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데 굳이 다방을 찾을 필요는 없죠"라고 말했다.
이젠 곳곳에 커피자판기가 들어섰으며 빌딩 복도마다 '휴게실'이 생겼다. 경기 탓도 있다.
ㅁ다방 정인숙(54·여)씨는 "경기가 좋지 않으니 마음의 여유가 없고 다방에서 차 한 잔을 운치로 느꼈던 사람들도 '다도'를 즐길 여유를 잃고 있는 것"이라며 "20년 전에는 2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는데 지금은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ㅁ다방은 불과 몇년 전 아가씨만 11명 정도 두고 있을 정도로 잘 나갔다. 지금도 노인들이 이곳을 주로 찾아 1천500원에 깨죽, 과자, 포도주를 먹고 있다. 하지만 만남의 장소, 실업자의 쉼터였던 이곳은 이제 '노인들의 사랑방'일 뿐이다.
대구 중구 중앙시네마 뒤쪽 ㅅ다방에는 중절모를 멋지게 쓴 할아버지 서너 명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글'이 붙어있고 숫자만 나오는 달력, 몇 개의 신문이 노인을 위한 쉼터로서는 충분했다. 주인도 노인만을 위한 휴식처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었다.
한국인포데이터 고객센터에 대구지역 '다방'으로 등록된 업소는 모두 400여 개. 그러나 업소를 정리하고도 자료정리를 하지 않은 다방이 상당수 포함돼 있어 실제 수는 이보다 훨씬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사진: 다방이 사라지고 있다. 휴대전화 보급확대에 따라 약속장소로서의 의미가 퇴색되고 레스토랑, 카페 등 업그레이드된 휴게시설이 다방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 사진은 손님이 없어 파리만 날리고 있는 서구의 한 다방. 이채근기자 minch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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