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당당하고 편안하게…마지막 여행을 위하여

지난해 일본에서 개봉한 이누도 잇신(犬童一心) 감독의 영화 '시니바나'(死に花)는 노인들의 죽음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슬프고, 외롭고, 또 두려운 마지막 여행이지만 어차피 가야할 길을 미리 준비한다면 좀 더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 원래 '시니바나'는 죽음으로써 얻는 명예라는 뜻이다.

영화 속 노인요양시설에서 생활하는 한 노인은 죽음에 앞서 한 장례전문회사에 자신의 장례식을 주문한다.

그리고 죽음. 장례식장에서 이 노인은 생전에 녹화한 비디오테이프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는 마치 현장에서 지켜보듯이 자신의 장례식을 순서대로 진행한다.

생전에 좋아하던 곡의 연주를 부탁하고, 또 문상객들에게 함께 춤추자고 권유한다.

무겁고 침울하던 장례식은 어느덧 숭고한 생을 마감한 한 사람을 즐겁게 보내는 '축제'로 바뀐다.

그리고 그 노인이 남긴 유언장 '시니바나'를 통해 남겨진 동료들은 새로운 죽음을 배우게 된다.

노인과 죽음. 굳이 노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어느 한순간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죽음을 잊고 살 수 없다.

하지만 취재팀은 실제 노인들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가 쉽지 않았다.

조용히 이야기를 하기보다 다짜고짜 화를 내는 경우가 대부분. "이눔아, 날 더러 일찍 죽으라는 말이여?" 하지만 이런 노여움이 클수록 그만큼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해 노인 자살은 4천명 선에 육박한다.

비록 자신의 의지라고는 해도 자살은 아무런 준비가 없는 죽음이자 극한 상황에 의한 타살이다.

특히 대구·경북의 노인 자살 증가세는 전국 평균의 4배가 넘었다.

그만큼 더 외롭고 비극적인 죽음으로 지역의 노인들이 내몰린다는 뜻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좀 더 당당하고 의연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을까?

▲죽음, 그들의 이야기

달성공원에서 만난 박이문(72·서구 원대동) 할아버지는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 살 만큼의 여유는 가지고 있다.

자식들도 모두 독립해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

"노인들이 모두 와 더 살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나는 이제 내 생애 하고 싶은 것도 해봤고, 자식들도 다 키웠으니 이제 남은 생을 소일하는 일만 남았지. 하루하루 죽는 것 걱정하며 살고 싶진 않아. '때가 되면 가겠지'라는 편안한 생각을 갖고 살아."

빌딩 청소일을 하면서 자식들과 떨어져 산다는 이은순(가명·67) 할머니는 남은 생에 대한 계획이 뚜렷하다.

"자식들에게 신세지는 뒷방 노인네가 되고 싶진 않아. 아들이 함께 살자고 하지만 내가 더 불편해. 이제 슬슬 죽음이라는 것도 생각해보게 되지. 그동안 뒤도 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지냈고 나 자신을 위해 뭘 해 본 적도 별로 없었거든."

이 할머니는 4년 정도 더 일한 뒤 남은 생애는 노인대학 등에 다니면서 수지침을 배워 주변 사람들에게 그 지식을 나눠줄 생각이다.

"사실 죽음이야 두렵지. 그 먼 길을 혼자 가야한다니…. 하지만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해. 죽을 때 자는 것처럼 편안히 가려면 욕심을 버려야하지 않겠소? 그런 마음을 갖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매일 기도해요. 고통없이 가게 해달라고."

정순이(가명·76) 할머니는 몸이 아파 거동을 잘 하지 못한다.

혼자 힘으로 집 밖을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 할머니는 요즘 이상한 꿈을 꾼다.

"얼마 전에도 어떤 사람이 자꾸 눈앞에 있는 강을 건너오라더군. 왠지 가기 싫어 거절했지만 자꾸 재촉을 하는 거라. 괌 지르며 몸부림치다 잠을 깼어. 생각해보니 그 강을 건너면 죽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어."

정 할머니는 자신이 다니던 절의 스님이 가끔 문안인사를 오는 것이 큰 위안이다.

살아오면서 가졌던 욕심들을 모두 버리고 하나하나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보라는 충고를 들으면 죽음도 그리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렇게 죽음을 준비한다.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조언

대구호스피스 책임자인 박영미(45) 간호사는 생을 마감하는데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죽음에 대한 교육을 통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편안한 의식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 '누구나 죽는다, 죽을 때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 집착을 가지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노인들은 죽음을 말하는 자체에 대해 '나더러 일찍 죽으란 말이냐?'며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공개적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고 간다는 것을 느낄 때 혼자 가기 힘든 길이지만 편안히 가게 됩니다.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곽병원 어르신 병동의 책임간호감독인 강영주(39) 간호사는 "대부분 노인들이 나이로 인해 새 삶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개인이나 가정 단위에서 죽음을 준비하기는 쉽지 않은 만큼 국가나 지역사회가 나서야 하지만 아직 그 역할이 미미하다는 것.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은 순서없이 닥치는 만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5년째 간병사로 일하고 있는 이기옥(59)씨는 우리도 늙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거란 생각에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일종의 가족 대역인 셈이다.

돌보는 노인들이 때로는 시어른이나 친정 부모님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고 했다.

"죽음은 마지막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혼자 가야 하는 길이죠. 누구나 힘들어 합니다.

그런 노인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속을 다 비우고 가세요.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잘못했던 일은 사과하면서 홀가분하게 가셔야죠.' 하지만 쉽지 않죠."

이씨는 "이사를 다니다 보면 버려야 할 것이 많은 것처럼 인생도 그런 것"이라며 "다만 아직 우리 사회는 미련없이 버리는 것에 대한 교육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채정민기자 cwolf@imaeil.com사진: 노인들의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 는 장례식 풍경을 묘사하면서 추모를 위해 모인 가족간의 갈등, 화해를 그리고 있다. '축제' 에서 장례가 끝난 뒤 가족들은 돌아가신 어머

니가 남긴 사랑과 삶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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