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을 소나타

영욕의 어머니로 희생된 딸의 아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 전화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데, 엄마 안경 외에는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울먹인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자는 모습만 본 지 며칠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 생활에 적응하느라고 얼마나 힘들고 불안했을까. 내 일에만 몰두해 있느라고 아이의 어려움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들에게 마치 잘려지지 않은 탯줄처럼, 가끔 생명수처럼, 간절해지나보다.

영화 '가을 소나타'는 영욕이 엇갈린 극적인 삶을 살았던 어머니로 인해 희생되어야 했던 딸의 아픔이 전해지는 이야기다. 어머니 역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당시 암 투병 중이었고,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죽음을 앞둔 여배우의 열연은 짙은 회한과 절박감을 더해준다. 여자에게 성공한 사회인으로서의 삶과 헌신적인 어머니 역할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외길일까.

전 세계를 누비는 유명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는 딸 에바의 집을 방문한다. 꼭 7년 만이다. 정말 오랫동안 서로 연락이 없었다. 어머니는 딸의 안부를 묻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고, 딸은 어머니를 손님처럼 어려워하며 비위를 맞춘다.

모녀는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살아온 세월 속에서 나누었던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늘 지적하고 못 마땅해하던 어머니 앞에서 한 번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에바는 술의 힘을 빌려서 처음으로 어머니로 향한 적개심과 좌절감을 털어놓는다. 에바는 어머니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어머니는 연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웠고, 집에 있을 때는 피아노 연습에 매달렸다.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지극히 원했지만 한 번도 요구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귀찮게 하면 미움을 살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엄마는 화가 날 때 일부러 웃어 보이고, 아빠가 미울 때 사랑한다고 포옹해주고, 제가 지겨울 때는 사랑하는 내 딸이라고 하셨죠." 어머니는 자기감정과 모순되는 메시지를 전달하여 딸을 혼란스럽게 했다. 심리학자 배잇슨은 이런 의사소통 방식을 '이중 구속'이라 하여, 정신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엄마를 미워할 수 없기에, 미움이 공포로 변했죠. 공포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자신이 미쳐간다는 생각으로 무서웠어요." 에바는 결혼 전에 정신병을 앓았다.

어머니는 가족에게 소홀한 것에 대한 가책으로 과잉 보상과 자기변명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딸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을 갖기보다는 사랑과 염려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어머니였다. 에바는 사랑과 관심을 요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늙고 쇠약해진 어머니였기에,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가장 소중한 대상인 어머니의 사랑이 사라질까 두렵고, 채워지지 않으면 원망스럽고, 미워하면 죄책감이 들고, 떠날 수도 화해할 수도 없는 어머니와의 깊은 애증 관계에 놓인 경우가 많다. 신체적 질병이나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어머니, 직장에 매인 어머니 등 자기문제로 인해 자녀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수많은 어머니들 곁에서, 오늘도 '에바'처럼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어머니와 나의 관계를 깨닫는 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조병화 시인의 '어머니는 속삭이는 우주이고, 생이고, 아득히, 가득히 속삭이는 눈물이다'라는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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