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제야 말하는 미군 학살…56년만에 고향찾은 강옥점씨

"남편 한 풀어야 나도 편히 눈감을 듯"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의 한을 풀어 드려야 나도 편히 눈을 감을 것 같아 이제야 말합니다.

"

한국전쟁 때 미군의 무차별 총기 난사로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났던 강옥점(75·경기도 안산시) 할머니가 56년 만에 비극의 현장을 찾았다.

지난달 30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영전리 이명순(78) 할머니 댁. 이 마을에 사는 김효주(80) 할머니와 이윤판(62·이장)씨 등 당시 현장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과 가족들도 모였다.

1950년 9월 23일 오후, 이곳 황강을 사이에 두고 퇴각하는 인민군과 진격하는 미군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가족과 이웃끼리 마을 뒤 야산에 미리 파놓은 방공호에 대피했다.

오후 4시쯤, 콩볶는 듯 총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더니 방공호 입구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말이 통하지 않아 'OK! OK!'라는 절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격은 멎었지만 부상자는 밀양과 창녕으로 후송되고 생존자들은 후방 인근의 초계초등학교로 보내졌다.

현장 접근을 막아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한달쯤 후다.

미군들은 시신을 방치한 채 철수하고 없었다.

강씨의 남편 이명수(당시 33세)씨와 문씨(42·여)가 현장에 숨져 있었고, 김효주 할머니의 숙모(41)는 후송 도중 숨졌으나 시신을 돌려받지 못했다.

부상자는 신외섭(사망)씨 등 10여 명. 일곱살 나이로 허벅지에 총탄을 맞은 이윤판씨는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10여 년이 지나 탄환을 뽑아내는 등 심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강씨는 당시 생후 3개월 된 아들(이갑이·56)을 포대기에 싼 채 방공호에 함께 있다가 남편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생생히 목격했다.

"한 점 혈육인 아들을 키우기 위해 억울함을 털어놓을 여유도 없었다"는 강씨. "생각하면 치가 떨려 그동안 고향 하늘 쪽은 쳐다도 보기 싫었다"며 한탄했다.

따라서 "백주 대낮에 인민군도 아닌 미군이 양민을 죽인 것은 학살"이라며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강씨 등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위원장 이창수)'에 이 같은 피해 사실을 접수시키고,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 등을 촉구했다.

한편 국회의원 102명이 발의한 '통합특별법(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청산법)'이 국회에 제출돼 이달 중 표결 처리될 예정이다.

합천·정광효기자 khje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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