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밀란 쿤테라 '정체성'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글은 어느 정치인의 항소 이유서에 기술한 그의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다.

또한 어느 여성 정치인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다"라며 기자의 질문에 현문우답했다는데 밀란 쿤테라는 우리시대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양태의 극한을 통해 '정체성' 그 실루엣의 커튼을 걷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혼동하는 것, 그(장 마르크)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때마다 놀라움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녀(샹탈)와 다른 여자와의 차이점은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에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없단 말인가…?

밀란 쿤테라, 1929년 체코에서 태어나서 현재 프랑스에 이주하여 파리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느림' 등 다양한 화제의 베스트셀러를 생산한 당대의 거장으로 이 소설에서는 순간과 영원, 나와 타자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관한 끝없는 의심과 권태를 침의 바다에 빠뜨리고 있다.

'일군의 박테리아와 더불어 정부의 입에서 그의 애인의 입으로, 애인의 입에서 그의 부인의 입으로, 부인의 입에서 아기의 입으로, 아기의 입에서 아줌마의 입으로,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인 아줌마의 입에서 그녀가 침을 뱉은 수프를 마신 고객의 입으로, 고객의 입에서 그의 부인 입으로, 그의 부인 입에서 다시 다른 입으로, 이렇듯 우리 각자가 우리를 하나의 타액 공동체, 축축하고 통일된 유일한 인류로 만들어주는 침의 바다 속에 빠져' 있으므로 물질적이고 산문적인 침 속에 허우적거리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말들을 하는 다수의 속중들에게 묻는다.

사랑함으로써 생기는 불신과 오해의 근거는 무엇인지, 그 근거가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 세상에 확실한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의 물음을 던지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방법으로서 '사랑'이란 관념의 구근을 침이 마를 때까지 씹고 있다.

고희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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