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키메데스는 무한히 긴 지렛대만 있으면 지구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구를 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거꾸로 서면 된다. 어차피 우주에는 위 아래가 없으니 지구를 든 거나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한번쯤은 했을 법한 이 놀이가 예술 작품의 아이디어라면 어떨까.
피에로 만조니의 1961년 작 '세계의 대좌'(1961)는 그 좋은 예다. 대좌는 조각의 받침. 이 작품은 대좌가 거꾸로 돼 있다. 덕분에 지구 전체가 통째로 하나의 작품이 된 셈이다. 이 작품은 '다시 합창합시다' 처럼 글자나 그림의 위'아래나 좌우를 뒤집어 놓고 보는 '앰비그램'(ambigram)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역시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살펴 보자. 1937년 작 '코끼리를 비추는 백조'에서 물 위에 뜬 세 마리 백조가 수면에 드리운 그림자는 놀랍게도 코끼리 형상이다. 그림을 뒤집어도 역시 똑같은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와 유사한 또 다른 놀이도 있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루브르 박물관의 소니에르 관장은 암살당하기 전에 여러 가지 암호를 남긴다. 관장이 남긴 암호는 '오 냉혹한 악마여, 오 불구의 성인이여'(O, Draconian devil, Oh, lame saint). 이 표현 속에 든 철자의 자리를 바꾸면 익숙한 두 개의 이름을 얻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Leonardo da Vinci, The Mona Lisa)'.
이처럼 알파벳 철자의 순서를 바꿔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애너그램(anagram)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neo)'는 구세주를 의미하는 '일자(one)'의 철자를 바꾸어 만든 이름이다. '해리포터'에도 비슷한 말놀이가 나온다. '비밀의 방'편에서 마왕 볼드모어는 50년 전 일기장의 기억 속에서 '톰 마볼로 리들(Tom Marvolo Riddle)'이라는 청년이다. 이 이름의 철자 순서를 바꾸면 '나는 주 볼드모트다(I'm Lord Voldmort)'라는 메시지를 얻게 된다. 기원전 3세기부터 사용된 애너그램은 신학자와 과학자, 음악가, 조형 예술가, 소설가 등이 자신의 의도를 감추는 동시에 드러내는 수단으로 자주 애용돼 왔다.
미학자 진중권이 펴낸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상상력'이라는 거울과 '놀이'라는 코드로 새로운 미학의 세계를 파고든 책이다. 주사위, 체스, 숨바꼭질, 그림자놀이, 불꽃놀이, 미로놀이, 인형놀이, 수수께끼, 마술, 만화경 등 20가지 놀이가 여러 예술 작품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소개한다.
모차르트는 주사위 2개를 던져서 나온 결과로 작곡하는 실험을 했고,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셀 뒤샹은 공중에서 실을 떨어뜨려 떨어진 형태 그대로를 작품으로 발표했다. 미국 추상 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은 막대에 페인트를 묻혀 캔버스 위에 흘리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 물감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낼지는 철저히 우연에 맡긴다. 렘브란트,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같은 유명 화가들이 광학기구를 이용해 실제 풍경을 캔버스에 비친 뒤 이를 베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 책은 읽는 자체가 놀이다. 갖가지 퍼즐 풀이가 가득하고 눈 옆에 책을 바짝 붙이거나 수직이나 대각선으로 돌려봐야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수백 장의 그림과 사진들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저자는 "상상력이 곧 생산력"이라고 말한다.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에게 상상력이 그저 '오류의 근원'에 불과했다면 상상이 기술을 통해 현실로 전화하는 테크놀로지 시대에 상상력은 현실의 조건이며 21세기를 이끄는 힘이다. 저자는 그 힘은 호기심에 한계가 없고, 상상력에 구속이 없는 '영원한 소년'으로 돌아가는 데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이재명, '선거법 2심' 재판부에 또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