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자의 길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직자의 외길은 관솔불 같은 매운 삶이지만, 활활 타는 장작불 신앙을 증명하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 중인 지역출신 종교계 인사들은 고향이란 울타리를 넘어 우리 시대의 정신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했다.
54년째 천주교 사제의 길을 걸으며 혼돈의 한국 현대사를 묵묵히 지켜온 김수환(金壽煥·83·세례명 스테파노) 추기경은 대구출신이다.
지난 22년 대구 남산동에서 가난한 옹기장수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 추기경은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서품(1951년)을 받고, 대구대교구 안동천주교회 주임신부로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마산교구장(1966년), 동양인으로 다섯 번째 추기경 서임(1969년), 서울대교구장 재임 30년과 은퇴(1998년), 금경축(金慶祝·사제 서품 50주년·2001년)에 이르기까지 고비고비마다 시대의 정의와 양심을 지키는 결단을 보였다.
김 추기경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똑똑하게 살지 못해 잘했다고 할 일은 없고, 그저 사제로서 보람을 느낀 일은 사제가 된 직후 안동과 김천성당에서 본당신부로 신자들과 직접 부딪히며 일했던 기억"이라고 회고했다.
평신도 중에는 신치구(申致求·74·베르나르도) 전 국방차관이 있다.
김천 출신인 그는 김천고(16회)를 나와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등 37년간 직업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3성 장군과 국방차관을 거쳤다.
신 전 차관은 퇴역(1988년) 후 국책자문위원이란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가톨릭 신앙생활 연구소'를 설립, 지금까지 가톨릭교회를 위해 봉사해 왔다.
신앙생활 연구소는 평신도가 세운 최초의 가톨릭교회 연구기관이다.
신 전 차관은 지난 2001년 김수환 추기경의 저술과 강연을 모은 전집 18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조부·조모가 성당에 워낙 열심히 다니신 분들이라 온 가족이 본받지 않을 수 없었다"며 "주일미사 때는 20명이 넘는 식구들이 두 분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천주교는 교구 중심이어서 대구·경북 출신이 서울에서 신부로 활동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지만 기독교는 다르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목사로 신앙을 증거해 온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경북 청송이 고향인 두레마을의 김진홍(金鎭洪·64) 목사는 빈민 사역의 대부로 통한다.
계명대 철학과를 졸업(66년)한 뒤 대학 강단에 섰지만 '책 속의 진리가 아닌 삶 속에서 살아있는 참 진리를 찾고자' 교수의 길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장로회 신학대학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난 71년 활빈교회를 설립, 서울 청계천에서 빈민들의 벗이 됐으며 긴급조치 위반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청계천 판자촌 철거명령이 떨어지자 정부에 땅을 달라고 요구,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960만 평의 간척지를 불하받아 오늘날의 두레공동체를 일궜다.
김 목사는 2001년부터 계명기독학원 이사장도 맡고 있다.
한국 기독교계는 물론 해외까지 널리 알려진 명성교회의 김삼환(62) 목사는 경북 영양 출신으로 종가집 장손의 1남9녀 중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한 아들이 죽지 않고 잘 자라도록 하겠다"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교회를 다닌 그는 영주와 안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뒤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지난 80년 서울 강동구 명일동의 허름한 상가 2층 건물에 명성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주일 낮 장년층 출석 3만여 명, 교회학교 출석 1만3천여 명(교사는 2천300여 명), 목사 40명에 이를 정도의 세계적인 대형교회로 키웠다.
얼마 전 영주의 영광여중·고를 인수하기도 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뜻인 예닮교회의 김호식(金浩植·71) 원로목사는 대구 출신으로 경북고(54년)와 연세대 신학과(58년)를 졸업한 뒤 일본과 미국에서 목회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명교회인 향린·경동교회를 거친 그는 실천신학, 특히 목회상담학을 전공해 심리학, 목회, 행정학, 상담학을 접목시킨 독특한 목회철학을 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외에 미션스쿨인 계성고 출신 재경(在京) 동문 목사들이 30여 명에 이른다.
계고 39회에서 73회까지 넓게 포진해 있으며 지난해 3월에는 서울 합정동 서현교회에서 '계성 목우회'를 결성했다.
목우회 회장이자 가정 사역단체인 '효 아카데미' 대표인 박재천(60) 목사는 계성고 50회로 총신대 신학대학원과 미국 풀러(fuller)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명지학원 교목으로 일해왔다.
등단시인으로 4권의 시집을 냈으며 목사출신 문인 모임인 '목양문학회' 회장을 역임한 박 목사는 "내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모교와 고향 발전을 위해 동문 목사들이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라며 "목회활동으로 서로 바쁘지만 1년에 몇 차례 만나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목우회 임원으로는 원로목사인 서정운 전 장신대 총장(39회)을 비롯해 배태익(52회·서울 동자동 성남교회)·김경원(53회·합정동 서현교회)·김성봉(55회·반포동 새반포교회)·박현식(58회·대방동 대길교회)·권순웅(60회·수원 주다산교회) 목사 등이 있다.
불교계에는 지역 출신 고승이 많다.
불교계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철(性徹·경남 산청·1993년 입적) 전 조계종 종정, 한국 최고의 선승인 서암(宋西庵·경북 안동·2003년 입적) 전 조계종 종정, 금강산 유점사에서 득도한 덕암(安德菴·문경·2003년 입적) 전 태고종 종정, 범어사 적통으로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석주(姜昔珠·안동·2004년 입적) 스님 등은 이미 열반에 들었지만 여전히 불자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스님의 고향을 추적하긴 쉽지 않다.
세속의 고향은 출가하면서 지워지기 때문에 출가한 산문(山門)이 바로 고향이 된다.
그러나 몇몇 큰 스님은 고향이 알려져 있다.
100명이 넘는 사형수를 불자로 귀의시켜 '재소자의 아버지'로 통하는 삼중(朴三中·73·세속명 박진홍) 스님은 달성 출신이다.
26세인 58년 해인사에서 출가, 화엄사·계림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대구 용연사 주지로 있던 67년 대구교도소를 찾기 시작한 것이 재소자와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됐다.
이후 전국 교도소 재소자 교화 후원회장과 법무부 갱생보호위원을 맡으며 재소자를 상대로 한 포교활동에 평생을 바쳤다.
삼중 스님은 "승려와 재소자는 닮은 꼴"이라며 "제복을 입고 이성과 단절하며 똑같이 죄를 참회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0년 대한불교 자비종을 창종, 종정으로 추대됐다.
한국불교의 대표적 학승인 이지관(李智冠·73) 전 동국대 총장은 포항 영일 출신으로 47년 해인사에서 출가, 자운 스님의 사미계를 받고 법문의 길을 열었다.
76년 동국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불교대학장(80년)을 역임한 뒤 86년부터 90년까지 4년간 동국대 총장으로 재직했다.
총장 퇴임 뒤 더욱 학문에 정진해 서울 명륜동에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을 설립, 불교학 전문학자를 양성하고 '불교대사림' '비구니계율연구' '계율론' 등의 연구서를 편찬했다.
'우리 시대의 부처'로 유명했던 성철 스님을 20여 년간 시봉한 원택(圓澤·61·세속명 여무의) 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대구 출신인 그는 경북고(63년)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67년)를 졸업한 뒤 속세를 뒤로 하고 지난 72년 성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성철 스님의 상좌 시절, 배고픔을 못 이겨 절을 떠나려 하자 성철 스님이 "공양할 때 돌을 씹어 치아가 상했다.
내 이빨 값 내놔"라며 발목을 잡은 일화는 유명하다.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그는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으로 재직하며 청소년 포교에 앞장섰으며 이후 성철 스님 생가(경남 산청군 묵곡리)에 세운 겁외사의 주지로 부임, 서울과 산청을 왕래하고 있다.
김태완기자 kimch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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