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초등학교 동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졸업한 지 50년이 넘었고,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많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해후는 매우 감격적이었다.
곱던 얼굴이 곶감같이 쪼그라들어 분칠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 꼬부랑 할망구가 되어버린 여자 동기들에게 옛 모습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때 운동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친구는 그 당당한 체구가 머리 빠진 백발이 되어 어거정 어거정 걷는 모습이 산 송장 같았다.
고려의 선비인 우탁 선생은 '한손에 막대잡고/ 한손에 가시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드니/ 백발이 제몬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며 늙음을 한탄했다.
시골 초등학교 동기회는 또 다른 애수(哀愁)가 있다.
부모형제가 윗대부터 흙과 함께 뿌리박고 살아왔기 때문에 뜨내기가 아니다.
학교 길 5리, 읍내 길 20리, 자전거도 자동차도 없던 그 시절, 시골길은 멀고도 멀기만 했다.
어쩌다 소달구지라도 얻어 타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고,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비행기도 타보고, 고속전철도 타보았지만 그때만큼 기분이 나지 않는 것은 나이 탓으로 돌려야 할까?
나무실은 목탄차가 지나가면 신작로 뽀얀 먼지가 구름같이 꼬리를 만들었다.
우리들은 겁 없이 뒤꽁무니에 매달려 모험을 즐겼다.
잘못하여 떨어지기라도 하면 양 무릎에서 솟아나는 피를 모래로 치료하고, 배가 고프면 진달래, 오디, 산딸기와 덜익은 감 등으로 허기를 면했다.
감을 먹다가 목이 메면 "먹고 싶어 먹었다.
멕히질랑 말아라"고 중얼거리며 가슴을 치면 내려가곤 하던 기억도 새롭다.
그러고 보니 약도 없고 병원도 없던 시절에 그 숱한 위험과 병을 앓고도 지금까지 버텨왔으니 용키도 하다.
동기생 숫자가 자꾸만 줄어간다.
누가 병원에 입원했고, 누가 죽었다는 비보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만큼이나 담담하게 받아들여진다.
일제강점기 때 영양실조로 말라빠진 어머니는 우리들을 잉태했고, 죄 없는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굶는 것부터 먼저 배웠다.
6·25 전쟁이 끝나고 개학을 해보니 3분의 1이 없어졌다.
혹독한 전쟁도 겪었고,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한 보릿고개도 겪었다.
맨주먹으로 경제도 발전시켰고, 물려 받은 것 없이도 부모님을 평생 잘 모셨고, 허리띠 졸라가며 자식 공부도 시켰다.
있는 재산 자식에게 다 주고 나니, 자식은 부모를 모시려고 하지 않는다.
억울하고 분한 세대들이다.
그때 나는 걷는 것이 지겨워 학교 가까이나, 읍내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제일 부러워했다.
지겹고도 지겹던 그 길이 지금은 아스팔트로 잘 다듬어져 있다.
내가 자가용으로 그 길을 달리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아득한 추억 속으로 새로운 감회에 젖어든다.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들은 여러가지 이야기 중에, 동기회가 잘되려면 성공한 친구가 나와야 한다고 했다.
성공의 기준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너무나 순수하게 자란 우리도 살아가며 돈과 권력의 힘을 보았기 때문일까?
무선이 이야기가 나왔다.
동기 중에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무선이기 때문이다.
전교 수석을 한 번도 놓친 일이 없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런 무선이가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하였다.
이를 비관하며 정신이상자가 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곳간에 가두어 놓았는데, 아까운 인생은 나래도 한 번 펴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
뒷바라지해 줄 수 있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력은 기본이고,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은 판가름난다.
조기과외와 유학을 필수로 하고 있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자식과, 밥도 못 먹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식은 이미 운명이 결정 나 있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자마자 재벌이 되어 있는 자식과 구멍가게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의 팔자는 이미 판가름이 난 것이다.
노력만으로 안 되는 사회를 알게 되면 희망을 잃게 된다.
희망을 잃는 것보다 더 비참한 사회는 없다.
문제는 부정을 해서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한 사람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영화나 연극의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면 영화와 연극은 만들 수 없다.
우리 사회도 영화와 연극에서처럼 주연과 조연이 모두 필요하다.
누구든 자기가 맡은 일에 땀흘려 일하는 양심있는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가 그립다.송일호 대구소설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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