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세가 위중한 것으로 전해져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세기 국제사회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중 한 사람이다.
1920년 5월18일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50㎞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바도비체에서 예비역 육군장교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교황의 본명은 카롤 요제프 보이틸라. '롤렉'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는 크라코프 신학교 시절을 거쳐 26세 때인 46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폴란드 크라코프 대교구장으로 있던 78년 10월16일 58세의 나이로 제264대 교황에 선출됐다.
그는 로마 가톨릭 역사상 456년 만에 선출된 비(非) 이탈리아인인데다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어서 일찍이 가톨릭계의 변화를 예고했다.
즉위 27주년째를 맞는 교황은 역대 교황의 평균 재위기간인 7.3년의 4배에 가까운 금세기 최장수 교황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2천 년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상 성 베드로, 피오 6세에 이어 3번째 최장기 재위 교황으로 기록돼 있다.
◇시련의 교황='신의 운동선수(God's Athlete)'라는 별명까지 가질 정도로 건강했던 그는 교황 재임 3년 만인 지난 1981년 5월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터키 극우파 회교도 메메트 알리 아그자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며 첫 시련을 겪었다.
총격 후 6시간의 대수술을 받은 뒤 4일 만에 의식을 회복한 교황은 "내게 총을 쏜 형제를 위해 기도하자. 나는 이미 진정으로 그를 용서했다"고 말해 전세계를 감동케 했다.
당시 교황은 성모 마리아가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고 믿고 세계평화에 헌신하기로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교황은 96년부터 파킨슨씨병으로 왼손을 떨며 왼쪽 얼굴근육이 경직되는 증상 외에도 만성적인 무릎 관절염를 앓으며 급격히 쇠약해지기 시작, 주위의 도움없이 걸을 수도 없게 됐다.
또 오른쪽 어깨뼈와 대퇴골이 골절된 적이 있으며 결장, 담석제거수술, 악성결장종양, 맹장염 수술과 수차례의 독감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고령과 함께 찾아온 건강악화는 줄곧 '신의 메신저'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었다.
◇행동하는 교황=요한 바오로 2세는 이전의 교황들이 교권수호에 전념한 것과는 달리 끊임없이 세계를 누비며 '행동하는 교황'으로 꼽혀왔다.
착좌 이후 지금까지 100여 차례 해외 사목 방문에 나서 전세계 130여 개 국을 방문, 400여 만 명의 신도를 모아 미사를 집전했다.
해외순방 거리만 200만㎞에 달한다.
교황은 조국 폴란드에서 공산치하를 체험한 탓에 공산주의에 완강한 반대입장을 견지하면서 79년 잇따라 조국 폴란드를 방문, 바웬사 등 당시 자유노조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동구권 해체에 기여했다.
또한, 89년 당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던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접견, 냉전종식에 힘을 실어주는 등 20세기 후반 이념붕괴의 격동 속에서 정치적 좌표를 설정해주기도 했다.
한국은 84년과 89년 두 차례 방문했고 84년 방한 때 순교성인 103위의 시성식을 가진 바 있는데 이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초로 바티칸이 아닌 현지에서 행한 시성식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신앙의 차이를 뛰어넘어 '생명의 가치'와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9억 가톨릭 신자는 물론 전 세계인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유엔인구개발회의의 낙태 허용안 채택을 끝까지 저지할 정도로 신념이 뚜렷하면서도 관용과 타협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인류의 정신적 지주=교황은 다른 종교에도 '진리의 씨앗'이 있음을 선언해 종교간 갈등을 줄이는 데 힘쓰면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등 보수적 로마 가톨릭교의 개혁에도 앞장섰다.
특히 초교파적 세계교회주의를 확산시키는 데에도 열성적이어서 그는 로마시내의 한 유대교회당에서 기도한, 그리고 세계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을 주재한 첫 로마교황으로 역대 어느 교황보다 유대교와의 관계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황은 400년 전 가톨릭이 개신교를 탄압한 역사적 과오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단교상태에 있던 북유럽 루터교 국가들과 관계를 회복하기도 했으며 해방신학의 발상지인 중남미도 방문했다.
지난 97년엔 미국의 반대를 뿌리치고 쿠바를 방문, 가톨릭과 쿠바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도 했으며 루마니아, 러시아 등 동유럽도 자주 방문해 그리스정교회를 비롯한 동방교회들과 일치를 꾀하고 있다.
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비난이 잘못됐음을 인정했으며 "진화론은 논리적으로 옳은 것"이라면서 과학과 신앙의 화해를 촉구하기도 했다.
나치치하 때 유대인들의 학살에 가톨릭이 소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살을 방임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타임스지는 "2천 년 교황청 역사 중 그만큼 강력한 목소리를 낸 교황은 없었으며 도덕가치가 실추된 요즘 세태에서 선한 인생의 비전을 제시하고 전세계가 이를 따르도록 했다"고 교황의 업적을 평가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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