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환(幻)

제철을 잊고 불쑥 튀어나오는 꽃들을 '광화(狂花)'라고 했던가. 지구 온난화 탓에 한겨울에라도 며칠만 날씨가 푸근하다 싶으면 봄이 온 줄 깜빡 속은 꽃나무들이 서둘러 꽃을 피우곤 한다. 옛사람들은 이를 상서롭지 못한 징조로 여겼다. 하지만, 따뜻한 햇살에 그만 속아버린 순진한 봄꽃들을 보면 철없는 아이 같아서 사랑스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해마다 개화소식이 빨라지더니 올봄은 유난히도 더디 왔다. 심술스런 날씨 탓에 이른 꽃축제에 갔던 사람들은 빈 나무만 보고 맨송맨송해져 돌아왔다. 제주에선 유채꽃을 피우느라 100kW짜리 발전기를 돌리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진해 군항제도 꽃이 늦어져 43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폐막일을 사흘이나 늦췄다.

다행히 요 며칠 새 햇살이 한결 도타워졌다. 마술을 부린 듯 꽃봉오리가 열리고, 시간시간 화사함이 더해져 간다. 제아무리 난다긴다 한껏 뻐겨도 때로는 한줌 햇볕만도 못한 존재가 인간이구나 싶기도 하다.

꽃소식은 남녘에서 비롯된다. 섬진강변 매화마을에서, 지리산의 산수유마을에서, 남해안의 이름 모를 남촌에서 불어오는 꽃바람이 남풍을 타고 올라온다. 곧 지천으로 피어날 들꽃'산꽃들로 행복한 꽃멀미를 앓을 때다.

하나씩 뜯어보면 그리 예쁘달 것도 없는 게 봄꽃이다. 이목구비 또렷한 장미 등에 견줄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있는 모습은 너무도 화사하고 정겨워서 사람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고, 불현듯 그리움에 젖게도 만든다.

그야말로 '봄의 환(幻)'이다. 때로 현기증이 나고, 까닭 없이 가슴이 콩닥거리는.... 하마 꽃잎을 떨구는 목련을 보면 어디 멀리 뱃고동 우는 항구로 가보고도 싶어진다. 하던 일 그만 탁 접어놓고 어디론가 불쑥 떠나버리고 싶은, 얄궂은 춘사월이다.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버리자...(중략)/저 열차를 타면/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그리운 이 그리워/문득 타보는 완행열차/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오세영 시 '그리운 이 그리워' 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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