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개천 龍'죽이기

모처럼 만난 중학교 동창은 술잔을 끝내 사양했다. 자정을 넘겨 모임이 파했으나 그는 귀가하지 못했다. 새벽에 학원수업을 마치는 딸을 데리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딸은 내신 성적이 대학입시에 반영되는 고1이다. 그는 아이도, 어른도 못할 노릇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내신만으로 입학사정을 하든지, 수능만 치르게 하든지, 이게 무슨 짓이냐며 교육당국을 원망했다.

모 고위 공무원도 대구 북구에서 수성구로 이사를 했다. 딸이 수성구 지역 고교에 입학해 아파트 평수를 줄였으나 돈이 모자랐다. 수성구의 집 값이 비싼 탓이다. 고교생을 자녀로 둔 한국의 40대 학부모들은 요즘 이렇게 산다. 자녀를 위해 잠을 줄이고 이사까지 하며 불편을 감수한다. 이것 만 하라면 못할 것도 없다. 정작 문제는 교육비다. 특히 학원비, 과외교습비 등 사교육비는 등골을 휘게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추정치로는 연간 13조6천억 원(학생 1명당 월평균 23만8천 원), 한국은행 추산으로는 지난해 8조 원의 사교육비가 국내에서 지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가계의 교육비 지출액에서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 2000년 28.4%에서 2001년 31.4%, 2002년 32.0%, 2003년 33.7%, 2004년 34.1%로 매년 증가추세다. 여기에 자녀의 해외유학'연수 경비로 지출한 해외 사교육비까지 포함하면 가계의 사교육비 총 규모는 16조 원이 넘는다.

이러니 '무자식 상팔자'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정부가 '1'2'3운동'(결혼 후 1년 내 임신해 2명의 자녀를 30세 이전에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을 펴고 연금을 더 얹어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고용불안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터에 자녀 뒷바라지에 모든 걸 쏟아 붓고 나면 자신의 노후는 챙길 여유가 없게 된다. 결국 저 출산 문제도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이 초래한 부작용인 셈이다.

사교육비를 감당할 능력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다행이다. 사교육비 역시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지난해 소득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의 교육비 격차는 7배에 달했다. 가구주 학력에 따라 사교육비 지출도 4배나 차이가 났다. 고학력자 가정이 자녀들에게 보다 많은 사교육비를 투입하고 이들 자녀가 다시 고학력자로서 높은 소득을 올리는 학력과 소득의 대물림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나태하고 무기력한 공교육에 대한 염증과 가중되는 사교육비 부담은 여유 계층 자녀들의 조기 유학을 부추긴다. 모 대학 여교수는 서울에서 열린 세미나 참가자 10여 명 중 조기 유학을 보내지 않은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고 전했다. 한 사람은 미혼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결혼이 늦어 조기 유학도 보내지 못하는 어린 자녀를 둔 사람이었다.

공교육의 붕괴는 교육조차 투전판으로 만들었다. '돈 심은 데 돈 나는 교육'이 된 것이다. 이래서는 개천에서 용(龍)이 태어날 수 없다. 이제 개천에선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를 지녀도 미꾸라지밖에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살 수 없다는 근로자가 66%에 이르고 그들의 자녀 역시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을 박탈하는 사회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사교육과 입시를 통한 계층 고착화의 음모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의 계층 상승기회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공교육의 부실을 방치하는 한편 입시제도를 수시로 바꾸고 있다는 주장이다. 과도한 피해의식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지역 부유층 자녀의 명문대학 입학 비율이 해마다 상승하고 있어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무시할 수도 없게 됐다. 요즘 웬만한 대기업 취업은 이른바 '스카이(sky)' 대학 출신이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민다. 음모론이 더욱 힘을 얻는 근거다.

모 외국계 회사 CEO는 국내 명문대학 출신들의 도전정신과 창의력 부족을 지적했다. 외국의 한 언론도 한국에서 인재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보도했다. 학부모들의 자녀 교육열이 세계 최고 수준인 나라에서 왜 이런 지적이 나올까. 돈 많은 부모들이 온실에서 키운 용(龍)인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공부한 게 아니라 사교육으로 길러진 '온실 용(龍)'들에게서 잡초 근성과 창의력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꼴이다. '온실 용(龍)'이 아니라 '개천 용(龍)'을 키우는 교육이 되어야 교육도 바로 서고 한국경제도 한 단계 도약할 것이다.

曺永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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