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빛'의 역정 26년-(1)냉전 체제 해소

"저는 조금 전에 제가 자란 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는 어머니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 조국은 우리 땅과 같은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폴란드는 나의 특별한 어머니입니다.

폴란드의 운명은, 특히 최근 수세기 동안 쉽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는 많은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고통을 받고 계시는 어머니입니다.

이것이 바로 폴란드가 특별히 사랑받을 권리가 있는 이유입니다.

"(1979년 6월 교황 선출 뒤 조국 폴란드 첫 방문시 도착 연설에서).

8개월 만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즉위한 카롤 보이티야는 고국 폴란드를 떠난 지 정확히 여덟달 만인 1979년 6월 2일, 교황의 자격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455년 만에 탄생한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공산권 출신 교황이었다.

그가 폴란드 바르샤바 오켕치에 공항 활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지에 입을 맞춘 순간, 폴란드에는 자유를 향한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9일 동안의 방문 기간 동안 폴란드 인구 3천500만 명의 3분의 1인 1천만 명 이상이 요한 바오로 2세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78년 교황 선출 결과가 공표된 직후 당시 KGB국장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는 앞으로 교황청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에 갈등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교황의 방문은 공산권이라는 견고한 둑에 자유를 향한 물꼬를 텄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역사적인 조국 방문이 있은 지 14개월 후인 1980년 8월 14일, 바웬사 전 대통령과 그단스크 조선소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자유노조'가 파업을 선언했다.

자유노조는 조직적인 반체제 저항운동을 벌임으로써 폴란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소련 체제와 공산주의에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의 침략과 지배에 신음하며 조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그가 조국을 공산체제에서 '해방'시켜야 겠다는 의지를 가진 건 당연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인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공산주의가 인류의 역사에서 영원히 빗장을 잠글 수는 없습니다.

"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자유노조 등 민주화운동 세력을 적극 지원했다.

1983년 두 번째 방문 당시 자유노조의 지도자인 바웬사를 비밀리에 만나 격려했고 야루젤스키 공산당 서기장과 협상을 벌여 폴란드의 계엄령을 해제했다.

이후 폴란드의 자유화 물결은 동구권 전체를 휩쓸었다.

헝가리가 국경을 개방했고, 동독에서는 수십만 군중이 대정부 시위에 나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다.

불가리아에서는 독재자가 추방됐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공산당과 야당의 연립 정부가 수립됐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안보보좌관이 "요한 바오로 2세가 소련 체제에는 수백 개 사단 이상의 위협적인 존재"라고 평가한 것이 허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1989년 12월 요한 바오로 2세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던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바티칸으로 초청해 '세기의 만남'을 가졌다.

20세기 후반 이념 해체의 격동기 속에서 교황청이 정치적 좌표를 설정해 준 것이다.

1997년엔 미국의 반대를 뿌리치고 쿠바를 방문, 가톨릭과 쿠바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도 했다.

지난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25년간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고 보도했다.

104개 국 3만 명에게 인터넷 설문조사를 한 결과였다.

네티즌들이 교황을 1위로 꼽은 이유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였다.

지난 25년 사이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인 공산권의 몰락에 교황이 가장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람들의 가슴에 담긴 평화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참혹했던 냉전시대를 화해와 용서의 시대로 녹여 냈다.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랑 없는 연대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우리에게는 패배도 승리도, 좌파도 우파도 없습니다.

단지 서로를 돕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똑같은 인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실패를 경험한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회개와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승리를 획득한 이들은 사랑과 자비의 복음에 따라 참된 평화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용서의 덕목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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