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단 일기

오전 6시 30분. 나를 깨우는 첫 번째 알람 소리를 슬쩍 외면하며 뒤척이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이불을 확 젖힌다. 큰아이 학교에 가져갈 수저와 물, 둘째아이 유치원에 가져갈 빈 도시락과 수저를 챙기며 주부'직장인의 아침이 동시에 시작된다. 아침상을 차리고 식구들을 차례로 깨우며 화장을 한 후, 느리게 상 앞에 앉는 둘째아이의 숟가락과 내 숟가락을 번갈아 잡으며 아침을 먹는다. 큰 아이가 어제 말 안 했다며 오늘 가져갈 준비물을 하나씩 주워섬긴다. 학급문고에 가져갈 책 3권, 모형항공기 연습할 때 필요한 실타래 등이다. 큰아이의 준비성 없음을 나무라며 둘째의 갈래머리에 방울을 묶는다.

오전 8시 30분.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일제히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한다. 3월 한 달 동안 기본 예절교육을 충실히 시킨 보람이 있다. 자리에 앉으며 숙제 검사를 한다. 한 녀석이 깜박 잊고 숙제를 집 책상 위에 놓고 왔다는 것이다. 갑자기 큰 애가 떠오른다. 그래서 내일까지 가져오라고 한다. 내 아이의 선생님도 그렇게 해주시기를 바라면서 나도 아이에게 어떻게 행동할까 결정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처음에는 반의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대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의 역할과 교사의 역할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객관성을 잃기 마련이다. 교사는 그런 객관성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넓은 시각으로 교육적인 유도자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학급의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대하기보다는 내 아이의 선생님이 내 아이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행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가 선택하는 타협점의 행동이란 것도 많은 부분, 주관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낮 12시 20분. 한 아이가 수저를 가져오지 않아 우두커니 배식판 앞에 앉아 있다. 자주 그러는 아이다. 교실에 이 아이의 수저를 따로 둘까 생각해 봤지만 그러면 스스로 물건을 챙겨오는 일을 익히는데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물이며 교과서도 반절이나 챙겨올까 말까 하는 아이인데. 하지만 '내 아이가 수저가 없어 저렇게 그냥 앉아 있다면?'하는 생각이 들자 급식실에서 수저 한 벌을 빌려오도록 한다. 교사의 객관성이 어머니의 그것에 밀리는 순간이다. 아니, 그 반대인가?

오후 3시. 수학시간에 다하지 못한 무늬만들기를 완성하기 위해 두 아이가 남았다. 공부시간에 뒤에 앉은 친구와 장난 조금치고, 옆에 있는 아이와 조금 다투고 그러느라 바닥에 흩어진 필통의 물건 주워담으며 시간을 보낸 대가다. "집에 가서 해오면 안 될까요"하는 물음에 "다하고 가라"고 대답한다. 내 아이의 선생님이 해주었으면 하는 대답이고 내가 찾은 타협점이다. 하지만 다시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또한 역시 어머니의 주관적인 바람이다. 그러니 학부모의 교육과 교사의 교육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를 따져보면 그것은 한 곳에서부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후 4시 20분. 내일 알림장을 쓰다가, 6교시를 마치고 태권도학원을 다녀올 큰아이를 떠올리며 숙제 하나를 슬그머니 지운다.

김현숙(대구월성초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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