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신통찮은 기업도 서울에만 있으면 정부 정책의 혜택을 누리는데, 대구경북 벤처는 지방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당합니다. 더럽고 서러워서 서울로 가야지···."
국민의 정부가 한창 벤처 붐을 일으키던 2001년. 지역 벤처기업인들 사이에 쏟아졌던 푸념이 결코 경쟁력 없는 기업의 근거없는 하소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촉망받던 지역 벤처 몇몇은 정부 정책의 분위기에 따라 수도권으로 떠났다. 지역에 공장을 둬 이전이 쉽지 않은데다 국제 경쟁력을 갖춰 구태여 정부 지원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던 우량 벤처는 '못마땅하지만, 이를 악물고' 아예 자립의 각오를 다졌다. 벤처에게 지방은 오아시스 없는 황량한 사막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대구경북은 서울, 경기에 이어 대전충남과 함께 3번째로 벤처기업 및 이노비즈기업(기술혁신형 첨단기업)이 많다. 그러나 정부 정책은 항상 서울·경기·대전 중심으로 추진됐다.
◆수도권 돈잔치로 끝난 벤처 육성
국민의 정부는 2001년 벤처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무려 2조2천100억 원의 프라이머리 회사채 담보부 유동화증권(P-CBO)을 발행하고, 서울·경기와 대전 등 수도권 벤처기업들을 집중 지원했다. "다른 지방에는 지원할 만한 벤처가 별로 없다"는 게 당시 자금집행 금융권과 정부기관 관계자들 말이었다고 업계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감사원 감사결과, 당시 벤처육성책이 세금으로 광역수도권에 돈 잔치를 벌인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해 말 6천100억 원이 부실화했는데 대구경북 벤처가 부실화시킨 금액은 전무했다.
쓸 만한 기업이 없다는 지방의 사정은 어떨까. 기술신용보증기금 영남지역본부 김창수 차장은 "대구, 경북, 부산, 경남, 울산을 통틀어 18개 업체가 보증서를 다시 끊어 P-CBO 상환을 연기했는데, 김해의 1개 업체를 제외하고 부실화할 가능성이 있는 업체는 없다"고 말했다. 수도권 벤처는 부실 가능성이 높아도 쉽게 지원을 받았지만, 지방 벤처는 탄탄해도 정부정책의 혜택을 보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음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결과다.
◆부실없는, 그러나 소외된 대구경북
대구경북에는 268개(9.7%)의 이노비즈 기업과 593개(7.1%)의 벤처기업이 있다. 서울, 경기에 이어 대전충남(이노비즈 251개, 벤처 596개)보다도 오히려 많다.
그렇다면 국민의 정부 당시 P-CBO의 혜택은 어느 정도 누렸을까. 지난해 말 보증서를 재발급해 자금상환이 연기된 전체 금액은 7천500억 원. 이 중 대구경북은 10개 업체가 257억 원의 혜택을 받았다. 전체의 3.4% 수준에 불과하다. 대구경북과 부산, 경남, 울산 등 영남권 모두를 합해도 18개 업체 498억 원에 불과하다. 이를 전체 지원금액 2조2천100억 원에 비교해보면 채 2%가 안 되는 규모다.
기술신보 대구기술평가센터 박진서 팀장은 "증권사 등과 본부에서 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자금 지원이 수도권에 집중됐고 대구경북은 전국에서 차지하는 벤처 비중에 비해 너무 적게 지원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벤처정책, 바뀌어야 한다
벤처정책의 지방 홀대를 없애려면 지방정부와 벤처지원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업에 전념해야 하고, 중앙정부의 각종 정보에 어두울 수밖에 없는데다 힘도 약한 지방의 중소벤처기업이 어떻게 스스로 의견을 내 국가정책에 반영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지방정부와 벤처지원기관들이 이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지방 벤처라고 얕보고 무관심하기는 지방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벤처기업인들은 "지방정부가 언제 지역 벤처기업의 의견을 모아 정부 벤처육성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한 적이라도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 때문에 기업인단체가 먼저 변신을 시도했다. 지난해 말 벤처기업협회(KOVA) 지부로 있던 대구경북벤처기업협회가 (사)대구경북첨단벤처기업연합회로 '독립'한 것이다. 수도권 기업만 대변하는 KOVA의 들러리 노릇을 그만하고, 지역 첨단·벤처기업의 목소리와 권익을 대변하겠다는 취지다.
대구경북첨단벤처기업연합회 김재우 연구원은 "올해 하반기 본격화할 '제2벤처 활성화 대책'에서 지방이 또다시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관심을 촉구하는 동시에 지역에서도 정책대안을 마련하고 적극 반영시킬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대구경북첨단벤처기업연합회(회장 박용일 유니빅 대표)는 상근 직원을 2명에서 4명으로 늘리고, 중앙정부와 연계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인사를 상임 부회장으로 초빙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석민기자 sukmi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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