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푸른 혼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지도 못한 채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그 30주년 추모식이 찬비가 듬성듬성 내리치는 가운데 도심에서 도도하게 치러졌다. 어둡고 축축한 산묘지로 발길을 옮긴 추모객들의 마음엔 아직도 못다 이룬 가슴속 세상들을 그분들의 한과 넋으로 조립해 보느라 눈빛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러나 발걸음은 그렇게 느릿느릿 오히려 피 흘린 시절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 인혁당 사건을 '이제는 말해야 한다'며 정면으로 다룬 작가 김원일은 희생자들이 혼령이 되어 만나고 회포를 푸는 장면을 그려냈다.

이들이 왜 그렇게 급하게 사형을 당했는지 시국을 토론하기도 하고 서로의 죽음을 위로해주며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내고 씻김하는 형식의 연작소설 '푸른 혼'을 집필해 그들의 영전(4월 9일)에 바치고 있다.

특히 '팔공산'에서 송상진이 자라나고 고뇌하다가 묻힌 팔공산을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한국전쟁을 거쳐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죄 없는 무수한 넋을 품에 안았으되 침묵 속에 장엄하게 버텨선 넉넉한 산으로 그려냈다.

팔공산 자락을 떠도는 송상진의 죽은 넋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억울 절통하게 죽은 혼이 육신을 빠져나와 그를 키운 설움과 한의 성채인 팔공산으로 기어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 외에도 이수병과 김용원의 삶을 다룬 '두 동무', '여의남 평전', 서도원의 삶은 '청맹과니'에서, '투명한 푸른 얼굴'은 처형을 바로 앞둔 사형수의 내면적인 고통과 절망을, '임을 위한 진혼곡'은 희생자의 아내가 남편 허재완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통해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재판과정의 부당함을 진술하고 있다

작가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자신이 발딛고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되었고, 한국의 엄혹한 정치적 상황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관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면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서야 한다는데 각성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부터 속칭 분단소설류가 조금씩 진전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분들의 고난이 작가에게 미친 영향을 고스란히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작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시대에 대한 겸허함이 아닐까.

고희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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