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흔적으로 캐낸 '살인의 추억'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휴먼 앤 북스 펴냄

1972년 미국 볼티모어의 한 고층건물 발코니에서 아이리스 시가라는 여인이 떨어져 숨졌다. 경찰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자살로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 그러나 남편이 사고사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자살일 경우 남편은 아내의 이름으로 든 10만 달러의 보험금을 받을 수 없었던 것. 법의학자들은 당시 48세였던 여인과 키와 몸무게가 똑같은 인형을 제작, 떨어뜨리는 실험을 했다. 실험 결과 발을 헛디뎠을 경우 건물 외벽과 사체의 거리는 3.2m, 스스로 몸을 던졌을 경우 4.3m. 여자의 사체는 건물에서 5m 떨어져 있었다. 남편은 술이 취한 상태에서 아내를 발코니 밖으로 집어던졌다고 자백했다.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프랑스의 범죄학자 에드몽 로카르가 남긴 이 말은 범죄 현장 조사의 중요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금언이며 과학 수사의 진리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사건 현장에 단서를 남기게 마련이고, 현장에 있던 어떤 것을 지니고 돌아간다. 결국 사건 해결의 열쇠는 '그 단서를 찾아내느냐 마느냐'인 것이다.

책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는 범죄 현장에 남은 흔적, 머리카락, 지문, 혈흔, 탄피 등을 분석해 범인을 찾는 방법을 설명한 법의학 서적이다. 독극물학, 혈청학, 지문 감식, 사망자 얼굴 복원, 탄도학 등 여러 분야를 동원해 자칫 딱딱하기 쉬운 법의학과 과학적인 범죄수사 기법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구별하고 두개골과 뼈, 사체 속의 벌레들을 통해 신원과 사망 시간을 식별하며 DNA 감식으로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인기 TV외화 시리즈 'CSI 과학수사대'를 책으로 보는 듯하다.

아울러 O J 심슨 사건, 미치광이 폭탄 제조범 조지 메트스키 사건, '보스턴의 교살자' 앨버트 드살보, 리 하비 오스왈드의 케네디 암살 사건, 팬암 비행기 폭발 사고 등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은 100여 건의 굵직한 사건 파일들도 수록돼 있다.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살인 사건에 대한 최초의 유죄 판결, DNA 분석 결과를 살인 사건의 증거로 채택해 내린 최초의 유죄 판결 등 여러가지 '최초'의 사례들과 200여 장의 생생한 사건 현장 사진들도 괜찮은 볼거리.

범죄현장 조사관이 지켜야 할 기본 규칙은 '눈은 뜨고, 입은 다물고, 손은 주머니에 넣을 것'이다. 증거 수집반의 작업은 유물 발굴 작업에 나선 고고학자의 작업과 비슷하다. 이들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거기 있지 않아야 하는' 어떤 것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의외의 발자국일 수도 있고 몸싸움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흔적일 수도 있다. 타이어 자국이나 나뭇가지에 묻은 차량용 페인트, 흠집이나 파편, 핏방울이 묻어 있는 상태, 심지어 단 한 올의 머리카락, 콧물이 묻은 휴지조차도 범행 당시를 재구성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990년 10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패션사진작가 루이제 캐플란이 성폭행 후 잔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됐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이미 2차례나 있는 상태, 모두 동일범의 소행이었다. 그러나 설명하기 힘든 이유로 정액 분석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문가들은 살해 현장에서 수거한 엄청난 양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콧물이 묻은 종이 손수건을 찾아냈다. DNA 분석 결과 용의자 가운데 한 명과 일치했고 뉴욕 경찰은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사망시간의 추정과 관련 체온, 울혈 상태를 파악하는 것도 흥미롭다. 시체는 사후 4~6시간 후부터 굳어지는데 폭력상태에선 사망 직후 강직이 일어난다. 1854년 크리미아 전쟁 땐 포탄에 맞은 병사에 말탄 상태로 꼿꼿이 앉아 죽었다고 한다. 체온은 처음 6~8시간에 옷입은 상태로 시간당 1.8도씩 내려간다. 약물 중독의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부검대 위에서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저자는 생화학을 전공한 범죄 소설가다. 덕분에 이 책은 한편의 범죄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이 넘친다. 전문적이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범죄의 현장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며 어린 시절 꾸었던 탐정의 꿈을 다시 한번 더듬어 보는건 어떨까.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사진: 강도가 주먹으로 유리창을 부술 때, 작은 파편들이 강도쪽으로 날아가 옷에 박힌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