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한국인 지휘자

여러 해 전, 해외에 있었을 때 국내 최정상 교향악단으로부터 지휘요청을 받고 어떻게 부족한 나한테까지 연락을 주는지 놀랍고도 고마웠었다.

그런데 지휘료가 비행기표 살 정도밖에 안됐다.

외국에 살아도 한국사람이니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가끔 외국 오케스트라와 한국 순회연주를 할 때면 웃을 수밖에 없는 어이없는 경험을 한다.

'실력은 없어도 좋으니 외국인 지휘자는 없느냐'라거나, 사진촬영 또는 인터뷰 때도 외국인을 옆에 세워야 그림이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한국인 지휘자가 해봐야 서양음악을 얼마나 하겠느냐는 선입견과 백인우월 사고를 저변에 깔고 있다.

지구촌 어딜 가나 한국인과 한국제품이 인정받는데 왜 우리끼리는 인정을 안 하려 할까.

지휘하러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달라진 것은 피부색에 둔감해졌고, 어딜 가나 빨리 적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점이다.

세계적 대도시에서부터 후메네·잘라게르섹 같은 소도시까지 음악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지휘자로서의 큰 즐거움이고 보람이다.

35시간을 기차로 달려 오늘 아침 러시아 최남단 아스트라한에 도착했다.

카잔은 아직 눈도 채 녹지 않았는데, 이곳엔 봄이 마중나와 있었다.

시내로 나가보니 나와 닮은 얼굴들이 유난히 많다.

카자흐스탄인이나 칭기즈칸 지배 때의 몽골 후손들 같다.

우리 60년대풍의 허름한 옷차림과 칠이 벗겨진 건물들은 못 사는 북부보다도 더 가난해 보인다.

그런데도 오케스트라는 어떻게 이리 잘하는지, 음악교육시스템은 또 얼마나 체계적인지 놀라게 된다.

이태리인 매니저는 동양인이 무시당하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인 비엔나 왈츠오케스트라나 프라하 모차르트 오케스트라를 몇 년씩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지휘자라서 가능하단다.

실력을 기르는 것만이 세계 속의 한국을 위한 첩경임을 절감할 때가 많다.

노태철(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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